《경상남도사(慶尙南道史)》연표 왜국 식민지 임나 정설화 정체성 저해 삭제 필요
○경상남도는 동해안과 남해안의 해안지방으로 고대로부터 왜(倭), 왜구(倭寇), 왜적(倭賊), 왜군(倭軍), 일본(日本)이 침략하여 살상, 방화, 포로 등 극악무도한 만행으로 적대감의 상흔을 안겨준 피해지역이다.
△현재에도 경상도에 속한 독도를 일본에서 가시적인 도발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는 영토침략은 대의명분 축적의 역사침략에서 촉발된 것을 간과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인 허구성으로 점철된 《일본서기》에 의거한 식민학설을 《경상남도사(慶尙南道史)》의 연혁에 수록한 것은 한국 역사의 정체성을 훼손하는 것으로 그 실체를 발췌하여 허구성을 반론한다.
△《경상남도사(慶尙南道史)》에 경상남도의 연표를 보면서 임나일본부설은 가설이 아니라 한반도에 실체한 경상도에 임나의 역사로 자리 잡고 있어 심각한 한국 역사의 왜곡과 정체성을 훼손하고 있어 왜국의 식민 역사 불식의 관건으로 대두된다.
△《경상남도사(慶尙南道史)》중에서 “연표의 수록범위는 선사시대부터 2011년 12월 31일까지이며, 경남도의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연대기로 수록하였다.”라고 하였는데, ‘가야와 삼국시대(42~668년)’의 부분에서 《일본서기》에 의거한 임나일본부설은 정설로 수용하여 한국 역사에 당당히 경상남도에 연혁으로 등재한 주요 내용을 수록한 부분을 인용하여 하기에 제시하면서 간략하게 반론하겠다.
【《경상남도사(慶尙南道史)》연표 / 가야와 삼국시대(42~668년)】
◈<자료 1> 249년 •3월 아라타와케[荒田別], 가가와케[鹿我別]를 장군으로 삼아 구저(久氐) 등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탁순으로 가서 신라를 공격하여 무너뜨렸다. 그로 인하여 비자발(比自㶱:창녕), 남가라(南加羅:김해), 탁국(啄國), 안라(安羅:함안), 다라(多羅:합천), 탁순(卓淳:창원), 가라(加羅:고령)의 일곱 나라를 평정했다.(『일본서기』). [출처] 경상도사편찬위원회,《경상남도사(慶尙南道史)》, 2020, 14쪽.
▲『원전』《日本書紀 卷第九 氣長足姬尊 神功皇后》卌九年春三月 以荒田別ㆍ鹿我別爲將軍 則與久氐等 共勒兵而度之 至卓淳國 將襲新羅 時或曰 兵衆少之 不可破新羅 更復 奉上沙白ㆍ蓋盧 請增軍士 卽命木羅斤資沙沙奴跪是二人 不知其姓人也 但木羅斤資者 百濟將也 領精兵 與沙白ㆍ蓋盧共遣之 俱集于卓淳 擊新羅而破之 因以 平定比自㶱ㆍ南加羅ㆍ㖨國ㆍ安羅ㆍ多羅ㆍ卓淳ㆍ 加羅 七國 仍移兵 西廻至古奚津 屠南蠻忱彌多禮 以賜百濟 於是 其王肖古及王子貴須 亦領軍來會 時比利ㆍ辟中ㆍ布彌支ㆍ半古 四邑 自然降服 是以 百濟王父子及荒田別ㆍ木羅斤資等 共會意流村今云 州流須祇 相見欣感 厚禮送遣之 唯千熊長彦與百濟王 至于百濟國 登辟支山盟之 復登古沙山 共居磐石上 時百濟王盟之曰 若敷草爲坐 恐見火燒 且取木爲坐 恐爲水流 故居磐石而盟者 示長遠之不朽者也 是以 自今以後 千秋萬歲 無絶無窮 常稱西蕃 春秋朝貢 則將千熊長彦 至都下厚加禮遇 亦副久底等而送之.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인터넷 검색 번역의 주석에 왜국의 식민지 100% 토착화, 한국의 중추적인 학술기관에서부터 일본의 식민사학 정설화 구축화>
§【반론】<자료 1>에서 “탁순으로 가서 신라를 공격하여 무너뜨렸다.”라고 했으나 그 당시 《삼국사기》에 첨해왕(沾解王) 3년(249) 4월에 “왜인이 서불한 우로를 죽였다.”라는 기사는 있으나 신라의 왕조가 멸망하지 않은 사실에서 《일본서기》에 신공황후(神功皇后) 49년(249)에 3월에 신라를 격파한 것은 허구성이다. 식민사학자가가 주구장창 한국의 역사를 왜곡하기 위하여 억측으로 120년 하대로 날조하여 249년에서 120년을 더하면 369년에 《삼국사기》에 내물왕(奈勿王) 재위 연도에 신라가 멸망하지 않았다.
○임나 “비자발(比自㶱:창녕)”은 본디 창녕 비화가야(非火伽耶)이며,
○임나 “남가라(南加羅:김해)”는 본디 김해 가락국(駕洛國)이며,
○임나 “안라(安羅:함안)”는 본디 함안 아라가야(阿羅伽耶)이며,
○임나 “다라(多羅:합천)”는 본디 합천 초팔국(草八國)이며,
○임나 “탁순(卓淳:창원)”은 본디 창원 비화가야(非火伽耶)이며,
○임나 “가라(加羅:고령)”는 본디 고령 대가야가 정석이다.
▲▲▲그런데 식민사학자에 의하면 ‘임나=고령’은 곧 ‘임나=가야’로 변조하면서 한반도에 왜국의 식민지로 토착시킨 핵심이다.
△한(韓)은 가라(加羅)이며, 한향(韓鄕)의 섬은 대마도에 소재한 가라(加羅, から)가 식민사학의 전유물로 전도한 것이다.
△가라(加羅)는 한 지역에 국한된 고유명사가 아니다. 즉, 공(空)도 ‘から’로 쓰인다.
△일본인 식민사학자는 가라(加羅)를 중심으로 유사한 임나 안라(安羅)와 유사한 아라가야를 식민지로 토착시켜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와 같은 인라일본부(安羅日本府)를 함안(咸安)에 토착시켜 왜국의 식민지 통치기관의 수부로 조작한 단초이다.
△남가라(南加羅)는 단순히 남쪽에 소재한 지금의 김해를 지칭한 것으로 본디 42년에 김수로왕(金首露王)이 건국한 이래 532년에 신라에 투항하기까지 찬란한 문화유산의 정체성을 지닌 가야제국의 종주국이 명백하기 때문에 임나의 남가라(南加羅)는 개입할 여지가 없는 날조된 허구성이다.
△일제강점기 창녕고분을 무참하게 발굴하여 출토한 유물을 일본으로 반출시켜 임나의 유물로 둔갑시킨 역사침략의 실체는 비화가야(非火伽耶)의 정통성을 지닌 문화유산을 임나의 구심축으로 악용하기도 하였다.
△일본인 식민사학자는 임나의 탁순(卓淳)은 엿장수와 마음과 같이 대구로 비정하는가 하며, 그것도 부족한지 창녕으로 끌어 오면서까지 한국의 역사를 왜국의 식민지 역사로 유린하였다.
◈<자료 2> 364년 •백제인 구저 등 3인이 탁순국[창원]에 이르러 왜와 통하는 길을 묻다. [출처] 《경상남도사(慶尙南道史)》, 2020, 15쪽.
▲『원전』《日本書紀 卷第九 氣長足姬尊 神功皇后》卌六年春三月乙亥朔 遣斯摩宿禰于卓淳國斯摩宿禰者 不知何姓人也 於是 卓淳王末錦旱岐 告斯摩宿禰曰 甲子年七月中 百濟人久氐ㆍ彌州流ㆍ莫古三人 到於我土曰 百濟王 聞東方有日本貴國 而遣臣等 令朝其貴國 故求道路 以至于斯土 若能敎臣等 令通道路 則我王必深德君王 時謂久氐等曰 本聞東有貴國 然未曾有通 不知其道 唯海遠浪嶮 則乘大船 僅可得通 若雖有路津 何以得達耶 於是 久氐等曰 然卽當今不得通也 不若 更還之備船舶 而後通矣 仍曰 若有貴國使人來 必應告吾國 如此乃還 爰斯摩宿禰卽以傔人爾波移與卓淳人過古二人 遣于百濟國 慰勞其王 時百濟肖古王 深之歡喜 而厚遇焉 仍以五色綵絹各一匹 及角弓箭 幷鐵鋌卌枚 幣爾波移 便復開寶藏 以示諸珍異曰 吾國多有是珍寶 欲貢貴國 不知道路 有志無從 然猶今付使者 尋貢獻耳 於是 爾波移奉事而還 告志摩宿禰 便自卓淳還之也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반론】《경상남도사(慶尙南道史)》에서 “364년 •백제인 구저 등 3인이 탁순국[창원]에 이르러 왜와 통하는 길을 묻다.”라고 했는데,
△《경상남도사(慶尙南道史)》에서 364년을 120년 상대로 조정하면 244년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일본서기》에 “甲子年七月中 百濟人久氐ㆍ彌州流ㆍ莫古三人”라는 갑자년은 신공황후 섭정 44년(244)으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244년에서 120년을 더하여 364년으로 수록한 것이다.
△《경상남도사(慶尙南道史)》에서 공식적으로 일본인 식민사학자가 한국역사를 침략하기 위하여 조작한 120년을 정설로 수용하여 역사 왜곡을 자초하고 있다.
△즉, 《일본서기》에 제14대 중애천황(仲哀天皇)[재위 192–200]의 배우자 신공황후(神功皇后)가 서기 200년에 남편이 죽자, 10월에 신공황후는 만삭으로 삼한정벌하고 축자(築紫)에서 응신천황(應神天皇)을 낳은 이래 줄곧 섭정한 69년(269)에 100세의 일기로 붕어한 것으로 기록했다.
△여기서 신공황후(神功皇后)의 아들인 15대 응신천황(應神天皇)[재위 270–310], 그 다음에 16대 인덕천황(仁徳天皇)[재위 313–399]에서 일본인 식민사학자의 허무맹랑한 허구성이 단적으로 드러난다.
△그 이유는 《일본서기》에 신공황후(神功皇后) 46년(246)은 식민사학자가 정한론(征韓論)에 입각하여 120년을 하대로 조정하여 366년 대화정권(大和政權)[야마토정권]에서 신공황후가 한반도에 삼한정벌을 날조 왜곡한 식민사학에서 비롯한 것으로 반증된다.
△식민사학자가 한국 역사를 왜국의 식민지로 복속하기 위한 목적으로 2주갑을 변조한 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격으로 새빨간 거짓말로 확인되는데,
△신공황후가 269년에 붕어한 연도에서 120년을 하대로 환산하여 369년으로 볼 때 15대 응신천황(應神天皇)[재위 270-310]은 일본 역사에서 영원히 사라져야 하며,
△16대 인덕천황(仁徳天皇)[재위 313-399]의 연간에 속하기 때문에 신공황후(神功皇后)가 대화정권에서 삼한정벌은 성립할 수 없는 허구성이 명백하다.
△이러한 역사 왜곡을 수용하는 것은 자기모순이 아닐 수 없으며, 이를 두고 자기가 자신의 발등을 찍는 형국에 비유할 수 있다.
△이 말을 알기 쉽게 비유하면, 자기 발등을 찍어서[역사] 멀쩡한 육신과 정신[영토와 주권]이 노예[남선경영론(南鮮經營論)]를 자청하여 임나일본부의 황국신민으로 원하는 것과 다르지 않겠는가?
◉《일본서기》에 역사의 진위는 차치하고,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국역】[탁순왕(卓淳王) 말금한기(末錦旱岐)가 사마숙녜(斯摩宿禰)에게 “갑자년(甲子年) 7월에 백제인 구저(久氐)ㆍ미주류(彌州流)ㆍ막고(莫古) 세 사람이 우리나라에 와서 ‘백제왕이 동방에 일본이라는 귀한 나라가 있음을 듣고 우리들을 보내어 그 나라에 조공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길을 찾다가 여기에 왔습니다.
△만약 신들에게 길을 통하도록 가르쳐 준다면 우리 왕이 반드시 군왕(君王)에게 덕이 있다고 할 것입니다’라 하였다.
△이 때 구저(久氐) 등에게 ‘전부터 동쪽에 귀한 나라가 있다고 들었지만 아직 왕래한 적이 없어 그 길을 알지 못한다. 바다가 멀고 파도가 험하여 큰 배를 타야 겨우 통할 수 있을 것이니 비록 길을 안다 하더라도 어떻게 도달할 수 있겠는가’라 하였다.
△그러자 구저(久氐) 등이 ‘그렇다면 지금은 갈 수 없겠습니다. 그렇지 않고 가려면 다시 돌아가서 배를 갖춘 뒤에 가야 하겠습니다’라 하고 ‘만약 귀한 나라의 사신이 오면 반드시 우리나라에도 알려 주십시오’라 하고 돌아갔다”고 하였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첫째, 탁순국(卓淳國)의 탁순왕(卓淳王), 백제(百濟)의 백제왕(百濟王), 귀국(貴國)으로 칭한 일본(日本)의 3국 중에서 백제(百濟)와 일본(日本)은 지리적인 위치가 모를 리가 없다.
○둘째, 백제 사람 구저(久氐)ㆍ미주류(彌州流)ㆍ막고(莫古)가 <자료 2>에 탁순국[창원]에 와서 일본의 지리를 문의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다. 즉, 백제 사람이 일본의 위치를 몰라서 한반도에 와서 문의하는 것은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으로 역사 왜곡의 농간이 분명하므로 탁순국(卓淳國)의 위치를 한반도에 비정은 크게 그릇된 것이다. 일본인 식민사학자가 탁순을 대구로 비정한 것이나 한국인이 창원으로 비정한 것은 오십보백보에 불과하며, 오로지 임나의 식민지를 한반도에 토착시키려는 교묘한 기만술책에 불과하다.
○셋째, 상식적으로 백제(百濟)에서 일본(日本)으로 가는 길은 바다에 배를 타고 가는 것은 삼척동자로 알 수 있는 내용이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해로에 뱃길을 묻기 위하여 탁순국(卓淳國)에 도착하여 문의한 것으로 보아서 탁순국(卓淳國)은 큰 바다에 군도(群島)에 위치한 것이 분명하다. 부언하면, 낮선 사람이 어느 섬에 갔을 때 그 섬에서 왜국으로 가는 뱃길을 묻는 것과 같은 이치로 보면 될 것이다.
▲▲▲▲▲《경상남도사(慶尙南道史)》에 “탁순국[창원]”은 지금의 창원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非火, <今昌寧恐髙霊之訛>.”라고 하여 고령이 와전된 것으로 의심했으나 고려에서 비화가야(非火伽耶)의 존재를 정립한 사실에서 《일본서기》에 임나의 탁순국은 개입할 여지가 없다.
◈<자료 3> 400년 •왜가 신라를 공격하자 광개토대왕이 경자년(400)에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어 왜(倭)를 치고 신라를 구원하였으며, 왜군의 뒤를 쫓아 임나가라[김해] 종발성까지 이르렀다.(「광개토왕비문」) [출처] 《경상남도사(慶尙南道史)》, 2020, 15쪽.
§【반론】《삼국사기》에 서기 400년은 신라 내물왕(奈勿王) 45년(400)에 전적이 일체 없음에도 불구하고 김해를 임나가라에 종발성을 단정한 것은 모순이다. 즉, 김해는 가야제국의 종주국으로 왜국의 영토인 왜국의 임나가라에 속한 바가 없기 때문이다.
◈<자료 4> 513년 •기문과 대사지역이 백제에 병합되다.(『일본서기』) [출처] 경상남도사편찬위원회,《경상남도사(慶尙南道史)》, 2020, 16쪽.
▲『원전』《日本書紀 卷第十七 男大迹天皇 繼體天皇》七年 冬十一月辛亥朔乙卯 於朝庭 引列百濟姐彌文貴將軍 斯羅汶得至 安羅辛已奚及賁巴委佐 伴跛旣殿奚及竹汶至等 奉宣恩勅 以己汶ㆍ滯沙 賜百濟國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반론】《일본서기》계체천황(繼體天皇) 7년(513) 11월 5일에 “조정에서 백제의 저미문귀(姐彌文貴)장군과 사라(斯羅)의 문득지(汶得至), 안라(安羅)의 신이해(辛已奚)와 분파위좌(賁巴委佐), 반파(伴跛)의 기전해(旣殿奚)와 죽문지(竹汶至) 등을 불러놓고 은칙(恩勅)을 선포하여 기문(己汶)과 체사(滯沙)[대사]를 백제국에 주었다.”라는 기사에서 등장하는
△백제, 사라(斯羅), 안라(安羅), 반파(伴跛), 기문(己汶), 체사(滯沙)[대사] 등에서 사라(斯羅)는 경주의 도읍지가 소재했었던 신라(新羅)로 통용은 잘못이다.
△즉, 양(梁)나라 양직공도에서 백제의 방소국(芳小國)의 하나로 사라(斯羅)의 지명이 등장하면서 신라(新羅)의 대국 전체를 백제의 강역으로 본 식민사학자의 주장은 역사왜곡이 명백하다. 즉, 방소국(芳小國)은 어원 자체가 소국이므로 사라(斯羅)는 한반도에 소재한 신라가 아니다.
△특히 양(梁)나라의 연간(502-557)에 한반도에 신라는 《삼국사기》에 신라 지증왕(智證王) 3년(502)부터 진흥왕(眞興王) 18년(557)에 해당하는 기간으로 그 사이에 진흥왕은 한강유역에 진출한 군사대국으로 정사를 펼치던 신라의 도읍지 경주가 백제의 작은 나라가 있었다는 주장은 역사 왜곡이 분명하다.
△이러한 문제로 인하여 식민사학자는 《삼국사기》를 배척하는 반면에 《일본서기》를 정설로 수용하는 모순이 발생한 것이다.
△《삼국사기》에 백제 무령왕(武寧王) 21년(521)에 “백성들이 굶주려 신라에 도망쳐 들어간 사람이 900호였다.”라는 기사에서 허구성이 증명된다.
△또한 같은 시기에 신라 지증왕(智證王) 13년(512) 6월에 우산국(于山國)이 항복하여 토산물을 바치고,
△동왕 15년(514) 정월에 아시촌(阿尸村)에 소경(小京)을 설치하고,
△동왕 동년 7월에 6부와 남부 지방에 사람들을 이주시켜 소경에 채운 사실에서 지금의 경주를 백제의 방소국으로 정립한 식민사학자의 주장은 100% 한국 역사를 왜국의 식민지 토착을 위하여 조작한 것이다.
△특히, 《삼국유사》에 아라가야(阿羅伽耶)는 지금의 함안(咸安)이 명백하기 때문에 《일본서기》에 안라국(安羅國)은 정통성을 지닌 아라가야(阿羅伽耶)에 개입할 수 없다.
△식민사학자는 함안을 안라국(安羅國)으로 토착시켜 안라일본부(安羅日本府)를 획책한 것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와 같은 통치기관을 지금의 함안에 정립은 역사 왜곡이 명백하다.
△따라서 낙동강과 섬진강 유역에 임나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문(己汶)과 체사(滯沙)[대사]를 백제국에 주었다.”라는 것은 애초에 한국에 소재하지 않은 지명으로 정립한다.
◈<자료 5> 529년 •3월 섬진강 하구에 위치한 대사(帶沙)지역[하동]을 병합해 왜로 통하는 항구를 확보한 백제는 섬진강을 넘어 남부가야를 압박하기 시작하다. [출처] 경상남도사편찬위원회,《경상남도사(慶尙南道史)》, 2020, 17쪽.
▲『원전』《日本書紀 卷第十七 男大迹天皇 繼體天皇》廿三年 三月 是月 遣物部伊勢連父根ㆍ吉士老等 以津賜百濟王 於是 加羅王謂勅使云 此津 從置官家以來 爲臣朝貢津涉 安得輒改賜隣國 違元所封限地 勅使父根等 因斯 難以面賜 劫還大嶋 別遣錄史 果賜扶餘 由是 加羅結儻新羅 生怨日本 加羅王娶新羅王女 遂有兒息 新羅初送女時 幷遣百人 爲女從 受而散置諸縣 令着新羅衣冠 阿利斯等 嗔其變服 遣使徵還 新羅大羞 飜欲還女曰 前承汝聘 吾便許婚 今旣若斯 請 還王女 加羅己富利知伽未詳 報云 配合夫婦 安得更離 亦有息兒 棄之何往 遂於所經 拔刀伽ㆍ古跛ㆍ布那牟羅 三城 亦拔北境五城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반론】《일본서기》계체천황(繼體天皇) 3년(529) 3월의 기사 중에 “以津賜百濟王”에서 백제왕에게 내려 준 나루를 섬진강 하구에 위치한 대사(帶沙) 지역으로 단정한 것은 모순이다.
△그리고 “由是 加羅結儻新羅 生怨日本 加羅王娶新羅王女 遂有兒息”에서 식민사학자의 주장에 의하면 시종일관 ‘가라=임나’의 프레임으로 역사 조작이 드러난다.
△즉, “가라(加羅)가 신라(新羅)와 한 편이 되어 일본을 원망하였다. 가라왕(加羅王)은 신라 왕녀(王女)를 아내로 맞아 드디어 자식을 두었다.”라는 기사에서
△529년 당시 가라(加羅)와 신라(新羅)는 나루를 백제왕에게 주었다는 이유 하나로 일본(日本)을 원망한 것은 한반도에서 발생한 사건이 아니다.
△그 이유는 “因斯 難以面賜 劫還大嶋 別遣錄史 果賜扶餘”에서 자연지리의 대도(大嶋)를 중심으로 사건이 전개되고 있는데,
△“이 때문에 바로 줄 수 없어서 대도(大嶋)로 되돌아 왔다가 따로 녹사(錄史)를 보내어 결국 부여(扶餘)에게 내려 주었다.”라는 대도(大嶋)는 큰 섬을 돌아서 나루가 실존한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於是 加羅王謂勅使云 此津 從置官家以來 爲臣朝貢津涉 安得輒改賜隣國 違元所封限地”에서
△“이에 가라왕(加羅王)이 칙사(勅使)에게 이르기를 “이 진(津)은 관가(官家)를 둔 이래로 신(臣)의 조공하는 나루터였습니다. 어찌 갑자기 바꾸어서 이웃나라에 줄 수 있으며 처음에 봉해 주었던 것을 어길 수 있습니까?”라는 기록에서
△가라왕(加羅王)이 조공하던 나루터는 대도(大嶋)의 해안을 유추할 수 있으며, 대도(大嶋)에 가라(加羅)와 백제(百濟)가 인접 국가이다.
△즉, 대도(大嶋)에 속한 나루터 유역에는 백제, 가라, 신라가 인접국가로 소명된다.
△그 증거로 《삼국사기》에 신라 법흥왕(法興王) 19년(532)에 가야국의 종주국인 금관국이 투항한 기사에서 신라는 군사강국으로 소명되며, 식민사학자가 주장하는 섬진강 유역의 하구는 이미 신라의 강역으로 복속한 사실이다.
△그 증거로 《삼국사기》에 신라 지증왕(智證王) 15년(514) 7월에 6부와 남부 지방에 사람들을 이주시켜 아시촌의 소경에 채운 사실에서 남해안 일대는 신라의 강역에 편입한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자료 6> 529년 •3월 대가야와 신라의 결혼동맹이 와해되었으며 신라가 본격적으로 가야지역으로 진출하기 시작하다. •안라[아라가야]는 고당(高堂)을 지어 국제회의를 개최하다. 회의의 목적은 아라가야의 정치적 성장을 백제ㆍ신라ㆍ왜에 널리 알리고, 가야지역으로 진출하려는 백제ㆍ신라에 대하여 외교적 압력을 가하려는 의도였다. 이 회의를 안라고당회의라 한다. [출처] 경상남도사편찬위원회,《경상남도사(慶尙南道史)》, 2020, 17쪽.
▲『원전』《日本書紀 卷第十七 男大迹天皇 繼體天皇》廿三年 三月 是月 遣近江毛野臣 使于安羅 勅勸新羅 更建南加羅ㆍ㖨己呑 百濟遣將軍君尹貴ㆍ麻那甲背ㆍ麻鹵等 往赴安羅 式聽詔勅 新羅 恐破蕃國官家 不遣大人 而遣夫智奈麻禮ㆍ奚奈麻禮等 往赴安羅 式聽詔勅 於是 安羅新起高堂 引昇勅使 國主隨後昇階 國內大人 預昇堂者一二 百濟使將軍君等 在於堂下 凡數月再三 謨謀乎堂上 將軍君等 恨在庭焉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반론】《삼국사기》신라 법흥왕(法興王) 16년(529)에 일체 대가야와 신라의 결혼동맹에 관한 와해의 기사가 보이지 않는다.
△《일본서기》에 계체천황(繼體天皇) 23년(529) 3월의 기사 중에 “遣近江毛野臣 使于安羅 勅勸新羅 更建南加羅ㆍ㖨己呑”라는 남가라(南加羅)의 국명에서 식민사학자가 한반도에 왜국의 식민지 토착화의 허구성이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즉, “이 달에 근강모야신(近江毛野臣)을 안라(安羅)에 사신으로 보내어 명령을 내려 신라에게 남가라(南加羅)와 녹기탄(㖨己呑)을 다시 세우도록 권하게 하였다.”라는 남가라(南加羅)는 식민사학자의 통설로 지금의 김해(金海)라고 단정하고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 신라 법흥왕(法興王) 19년(532)에 금관국이 투항한 사실을 기준으로 볼 때 《일본서기》에 계체천황(繼體天皇) 23년(529) 이후에도 한반도에는 독립국가인 금관국이 현존한 사실에서 한반도에서 발생한 사건이 아니라는 것이 입증된다.
△그러므로 식민사학자가 앵무새와 같이 주장하는 함안에 임나 안라국(安羅國)을 토착시켜 안라일본부(安羅日本府) 고당에서 국제회의는 허구성으로 증명된다.
△《삼국사기》백제 성왕(聖王) 16년(529) 10월에 고구려 안장왕(安藏王)이 친정하여 북쪽 변경 혈성(穴城)을 함락하자 3만 명의 보병과 기병이 오곡(五穀) 벌판에서 패전한 사실에서 왜국의 임나와 무관하다.
◈<자료 7> 541년 •4월 백제의 사비성에서 성왕의 주도로 1차 사비회의가 개최되다. 신라가 가야 남부 3국을 정복함에 따라 이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기 위한 회의였다. 가야의 7국이 회의에 참석했다. 안라ㆍ가라ㆍ졸마(卒麻)ㆍ산반해(散半奚)ㆍ다라(多羅)ㆍ사이기(斯二岐)ㆍ자타(子他) 등 7개국의 한기(旱岐)들과 가야지역에 파견된 왜의 사신이었던 키비노오미(吉備臣)가 참석하였다. 그러나, 백제가 신라의 가야침공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지 못했고, 이에 따른 가야지역의 독립성을 보장할 장치가 없었으므로 1차 사비회의는 결렬되고 말았다. [출처] 경상남도사편찬위원회,《경상남도사(慶尙南道史)》, 2020, 18쪽.
▲『원전』《日本書紀 卷第十九 天國排開廣庭天皇 欽明天皇》二年 夏四月 安羅次旱岐夷呑奚ㆍ大不孫ㆍ久取柔利 加羅上首位古殿奚卒麻旱岐散半奚旱岐兒 多羅下旱岐夷他斯二岐旱岐兒 子他旱岐等 與任那日本府吉備臣厥名字 往赴百濟 俱聽詔書 百濟聖明王謂任那旱岐等言 日本天皇所詔者 全以復建任那 今用何策 起建任那 盍各盡忠 奉展聖懷 任那旱岐等對曰 前再三廻 與新羅議 而無答報 所圖之旨 更告新羅 尙無所報 今宜俱遣使 往奏天皇 夫建任那者 爰在大王之意 祗承敎旨 誰敢間言 然任那境接新羅 恐致卓淳等禍等謂㖨己呑ㆍ加羅 言卓淳等國 有敗亡之禍聖明王曰 昔我先祖速古王ㆍ貴首王之世 安羅ㆍ加羅ㆍ卓淳旱岐等 初遣使相通 厚結親好 以爲子弟 冀可恒隆 而今被誑新羅 使天皇忿怒 而任那憤恨 寡人之過也 我深懲悔 而遣下部中佐平麻鹵ㆍ城方甲背昧奴等 赴加羅 會于任那日本府相盟 以後 繫念相續 圖建任那 旦夕無忘 今天皇詔稱 速建任那 由是 欲共爾曹謨計 樹立任那等國 宜善圖之 又於任那境 徵召新羅 問聽與不 乃俱遣使 奏聞天皇 恭承示敎 儻如使人未還之際 新羅候隙 侵逼任那 我當往救 不足爲憂 然善守備 謹警無忘 別汝所噵 恐致卓淳等禍 非新羅自强故 所能爲也 其㖨己呑 居加羅與新羅境際 而被連年攻敗 任那無能救援 由是見亡 其南加羅 蕞爾狹小 不能卒備 不知所託 由是見亡 其卓淳 上下携貳 主欲自附 內應新羅 由是見亡 因斯而觀 三國之敗 良有以也 昔新羅請援於高麗 而攻擊任那與百濟 尙不剋之 新羅安獨滅任那乎 今寡人 與汝戮力幷心 翳賴天皇 任那必起 因贈物各有差 忻忻而還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일본서기》에 흠명천황(欽明天皇) 2년(541) 4월에 “안라(安羅), 가라(加羅), 졸마(卒麻), 산반해(散半奚), 다라(多羅), 사이기(斯二岐), 자타(子他) 한기(旱岐) 등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의 길비신(吉備臣)과 백제(百濟)에 가서 조칙(詔勅)을 들었다.”라는
△541년 당시 《삼국사기》백제 성왕(聖王) 19년(541)에 양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한 기사에서 임나와 기사는 일언반구도 보이지 않으며,
△신라 진흥왕(眞興王) 2년(541) 3월에 이사부(異斯夫) 병부령이 중앙과 지방의 군사를 전담한 것은 군사강국으로 대적할 수 없는 막강한 군사력을 보인다.
△이때 백제에서 사신을 보내와 화친을 청한 사실에서 신라가 강국으로 소명된다.
△따라서 식민사학자가 날조 왜곡한 임나의 국명(國名)으로
○임나 안라(安羅)는 함안으로 왜곡하고
○임나 가라(加羅)는 고령으로 왜곡하고
○임나 졸마(卒麻)는 생림(生林)으로 왜곡하고
○임나 산반해(散半奚)는 초계(草溪)로 왜곡하고
○임나 다라(多羅)는 합천으로 왜곡하고
○임나 사이기(斯二岐)는 의령 부림으로 왜곡하고
○임나 자타(子他)는 거창으로 왜곡하였다.
△이와 같이 한반도에 식민사학을 토착시킨 것은 철저하게 《삼국사기》의 정사를 배척하고, 삼국초기의 역사는 원삼국시대로 기만하면서 《일본서기》를 정설로 수용한 결과 왜국의 식민 임나의 비정 일색은 곳곳에서 허구성이 노출된다.
△임나(任那)의 재건에서
△《일본서기》에 “가라(加羅)에 나아가 임나(任那)의 일본부(日本府)에 모여 서로 맹세하게 하였다.”라는 일본(日本)이라는 국명은 그 당시 생성하지 않은 사실에서 허구성이 정점을 이룬다.
◈<자료 8> 544년 •11월 2차 사비회의가 개최되었다. 안라국, 가라국, 졸마국, 사이기국, 산반해국, 다라국, 자타국, 구차국(久嗟國) 등 8국의 대표들과 안라국에 주재하고 있었던 왜신이 참여하다. 성왕은 신라에 대한 대비책을 제안하였지만 가야제국에게 유리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또 회의는 실패했다. [출처] 경상남도사편찬위원회,《경상남도사(慶尙南道史)》, 2020, 18쪽.
▲『원전』《日本書紀 卷第十九 天國排開廣庭天皇 欽明天皇》五年 十一月 百濟遣使 召日本府臣ㆍ任那執事曰 遣朝天皇 奈率得文ㆍ許勢奈率奇麻ㆍ物部奈率奇非等 還自日本 今日本府臣及任那國執事 宜來聽勅 同議任那 日本吉備臣 安羅下旱岐大不孫ㆍ久取柔利 加羅上首位古殿奚ㆍ卒麻君ㆍ斯二岐君ㆍ散半奚君兒 多羅二首位訖乾智子他旱岐久嗟旱岐 仍赴百濟 於是 百濟王聖明 略以詔書示曰 吾遣奈率彌麻佐ㆍ奈率己連ㆍ奈率用奇多等 朝於日本 詔曰 早建任那 又津守連奉勅 問成任那 故遣召之 當復何如 能建任那 請各陳謀 吉備臣ㆍ任那旱岐等曰 夫建任那國 唯在大王 欲冀遵王 俱奏聽勅 聖明王謂之曰 任那之國 與吾百濟 自古以來 約爲子弟 今日本府印岐彌謂在任那日本臣名也 旣討新羅 更將伐我 又樂聽新羅虛誕謾語也 夫遣印岐彌於任那者 本非侵害其國未詳 往古來今 新羅無道 食言違信 而滅卓淳 股肱之國 欲快返悔 故遣召到 俱承恩詔 欲冀 興繼任那之國 猶如舊日 永爲兄弟 竊聞 新羅安羅 兩國之境 有大江水 要害之地也 吾欲據此 修繕六城 謹請天皇三千兵士 每城充以五百 幷我兵士 勿使作田 而逼惱者 久禮山之五城 庶自投兵降首 卓淳之國 亦復當興 所請兵士 五給衣糧 欲奏天皇 其策一也 猶於南韓 置郡令ㆍ城主者 豈欲違背天皇 遮斷貢調之路 唯庶 剋濟多難 殲撲强敵 凡厥凶黨 誰不謀附 北敵强大 我國微弱 若不置南韓 郡領ㆍ城主 修理防護 不可以禦此强敵 亦不可以制新羅 故猶置之 攻逼新羅 撫存任那 若不爾者 恐見滅亡 不得朝聘 欲奏天皇 其策二也 又吉備臣ㆍ河內直ㆍ移那斯ㆍ麻都 猶在任那國者 天皇雖詔建成任那 不可得也 請 移此四人 各遣還其本邑 奏於天皇 其策三也 宜與日本臣ㆍ任那旱岐等 俱奉遣使 同奏天皇 乞聽恩詔 於是 吉備臣 旱岐等曰 大王所述三策 亦協愚情而已 今願 歸以敬諮日本大臣謂在任那日本府之大臣也 安羅王ㆍ加羅王 俱遣使同奏天皇 此誠千載一會之期 可不深思而熟計歟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일본서기》에 흠명천황(欽明天皇) 5년(544) 11월에 일본(日本), 안라(安羅), 가라(加羅), 고전해(古殿奚), 졸마(卒麻), 사이기(斯二岐), 산반해(散半奚), 다라(多羅), 자타(子他), 구차(久嗟) 한기(旱岐) 등이 백제에 나아가서 백제왕 성명(聖明)이 조서(詔書)를 보이는 것은 ‘조속히 임나(任那)를 건설하라’는 내용이다.
△《삼국사기》백제 성왕(聖王) 22년(544)에는 대외 관계 기사는 일체 없으며, 신라 진흥왕 5년(544) 2월에 흥륜사(興輪寺)를 완성하였고, 3월에 일반인이 출가하여 불교의 신봉을 허락한 기사에서 왕권국가의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하여 한강유역을 진출하는 전초단계에서 왜국의 임나 문제와는 전혀 개연성이 없다.
△《삼국사기》파사왕(破娑王) 29년(108) 5월에 비지국(比只國), 다벌국(多伐國), 초팔국(草八國)을 쳐서 병합하였다.
▲▲▲▲▲식민사학자가 날조 왜곡한 초팔국(草八國)은 지금의 합천군에 속한 초계면을 말한 곳으로 이곳에 초팔성(草八城)이 소재한 곳이다.
▲《고려사》태조 11년(928)에 “원윤(元尹) 김상(金相)과 정조(正朝) 직량(直良) 등이 강주(康州)를 구원하러 가는 길에 초팔성(草八城)을 지나다가 성주 흥종(興宗)에게 패배하여 김상이 전사하였다.”하여
△강주(康州)에 속한 초팔성(草八城)은 초계군의 강역이 명백하므로 《일본서기》에 다라국으로 날조 왜곡한 식민학설은 허구성으로 증명된다.
△또한 초계군에 속한 미타산성은 지금의 의령군에서 우륵의 고향을 날조하기 위하여 백제 성열성(省熱城)으로 조작한 미타산성은 초팔국의 강역이기 때문에 《일본서기》에 임나 사이기국에서 음상사로 비정한 신라 신이현은 본디 신라의 강역이 명백하므로 임나일본부설의 허구성은 발붙일 곳이 없다.
△즉, 초팔국의 강역에 임나 다라국과 사이기국은 개입할 수 없다.
△《삼국사기》눌지왕(訥祗王) 24년(440)에 “왜인(倭人)이 남쪽 변경을 침략하여 산 사람을 잡아갔다.”하여 낙동강과 섬진강 유역에 임나가 존재하지 않은 결정적인 증거이다.
△《삼국사기》눌지왕(訥祗王) 24년(441) 2월에 “사물현(史勿縣)에서 꼬리가 긴 흰 수꿩을 바쳤다.”하여 지금의 경남 사천은 108년에 신라의 강역으로 증명되므로, 우륵(于勒)이 태어나기 전에 신라의 강역이 명백하므로 우륵 12곡은 임나제국에 악용한 것은 허구성으로 증명된다.
△《삼국사기》지증왕(智證王) 15년(514)에 아시촌에 소경을 설치하고, 7월에 6부와 남쪽 주민을 옮겨 살게 한 사실에서 남부지역은 물론이며, 아라가야가 신라에 복속한 함안에는 《일본서기》에 임나 안라국이 존재할 수 없다.
△《삼국사기》법흥왕(法興王) 11년(524) 9월에 “왕이 남쪽 변방에 새로 개척한 지역을 두루 돌아보았는데, 가야국왕이 와서 만난 사실에서 한반도에는 식민사학자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임나제국은 역사침략에 불과한 날조 왜곡이 명백하다. 즉, 한반도에는 신라, 백제, 고구려, 6가야가 있었을 뿐이다.
△《삼국사기》법흥왕(法興王) 19년(532)에 금관국주(金官國主) 김구해(金仇亥)가 신라에 항복한 사실에서 식민사학자가 왜곡한 남가라는 존재하지 않았다.
▲▲▲▲▲《일본서기》에 “北敵强大 我國微弱 若不置南韓 郡領ㆍ城主 修理防護 不可以禦此强敵 亦不可以制新羅”라는 기사에서 지리적인 위치를 분석할 수 있다. 즉, “북쪽의 적은 강대하고 우리나라는 미약하니, 만일 남한(南韓)에 군령(郡令)과 성주(城主)를 두어 수리하고 방호하지 않는다면, 이 강적을 방어할 수 없다. 또한 신라를 제어할 수 없을 것이다.”라는 기사에서 남한(南韓)은 식민사학자가 김해 지역을 통설로 여기는데, 《삼국사기》에 532년에 금관국(金官國)이 신라에 복속한 바와 같이 한반도에 남한(南韓)은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남한(南韓)에 군령(郡令)과 성주(城主)는 대도(大島)는 대마도가 부합하며, 대마도의 남부지역이 곧 남한(南韓)이다.
△한(韓)은 곧 가라이며, 대마도는 한향(韓鄕)의 섬으로 닥나무의 주산지 저금신라국(楮衾新羅國)[고금신라국]이 소재한 곳으로 구주(九州)에서 볼 때 두 눈썹을 닮은 형상의 신라국은 신공황후가 정벌한 신라국(新羅國)이 한반도 신라(新羅)로 와전된 것이다.
◈<자료 9> 561년 •신라가 아라[함안] 파사산에 성을 쌓고 일본의 공격에 대비하다.(『일본서기』) [출처] 경상남도사편찬위원회,《경상남도사(慶尙南道史)》, 2020, 19쪽.
▲『원전』《日本書紀 卷第十九 天國排開廣庭天皇 欽明天皇》廿二年 是歲 復遣奴氐大舍 獻前調賦 於難波大郡 次序諸蕃 掌客額田部連ㆍ葛城直等 使列于百濟之下而引導 大舍怒還 不入館舍 乘船歸至穴門 於是 修治穴門館大舍問曰 爲誰客造 工匠河內馬飼首押勝欺給曰 遣問西方無禮使者之所停宿處也 大舍還國 告其所言 故新羅築城於阿羅波斯山 以備日本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일본서기》에 흠명천황(欽明天皇) 22년(561)에, 이 해 다시 노저(奴氐) 대사(大舍)를 보내어 지난 번의 조부(調賦)를 바쳤다.
△난파(難波)의 대군(大郡)에서 여러 번국(蕃國)들의 서열을 매겼는데, 장객(掌客) 액전부련(額田部連)과 갈성직(葛城直) 등이 백제의 아래쪽 열에 서게 하여 인도했다. 대사(大舍)가 화를 내고 돌아가 관사(館舍)에 들지 않고 배를 타고 돌아가 혈문(穴門)에 이르렀다.
△이 때 혈문관(穴門館)을 수리하고 있었다. 대사(大舍)가 묻기를 “어떤 손님을 위하여 짓는가”라고 하자 공장(工匠) 하내마사수압승(河內馬飼首押勝)이 거짓으로 “서방(西方)의 무례한 짓을 문책하러 보낼 사자가 머물 숙소이다”라고 말하였다.
△대사(大舍)가 나라에 돌아가 그가 말한 것을 고하였다. 그래서 신라는 아라(阿羅)의 파사산(波斯山)에 성을 쌓고서 일본에 대비하였다.
▲이 자료에서 “난파(難波)의 대군(大郡)에서 여러 번국(蕃國)들의 서열”을 정한 것에서 난파(難波)에 대군(大郡)이 소재한 사실에서 왜국 열도에 소재한 군소의 번국(蕃國)을 말한 것이다.
△그 가운데 왜국에서 백제를 번국으로 삼아 서열을 정한 것은 한반도에 백제가 아니다. 그 증거로 난파(難波), 혈문(穴門), 혈문관(穴門館) 등의 관사(館舍)에는 “서방(西方)의 무례한 짓을 문책하러 보낼 사자가 머물 숙소이다.”라는
△서방(西方)은 왜국 열도 구주지역에 서해도(西海島)를 말한 것이다. 식민사학자가 주장하는 한반도 함안에 안라일본부를 토착한 이른바 일본을 대표하는 통치기관의 치소에 신라가 일본을 대비한 축성은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자료 10> 562년 •1월 신라가 가야를 공격하여 멸망시키다. 가라국, 안라국, 사이기국, 다라국, 졸마국, 고차국, 자타국, 산반하국, 걸손국, 임례국 등 모두 10국이다.(『일본서기』) [출처] 경상남도사편찬위원회,《경상남도사(慶尙南道史)》, 2020, 19쪽.
▲『원전』《日本書紀 卷第十九 天國排開廣庭天皇 欽明天皇》廿三年 春正月 新羅打滅任那官家一本云 廿一年 任那滅焉 總言任那 別言加羅國ㆍ安羅國ㆍ斯二岐國ㆍ多羅國ㆍ卒麻國ㆍ古嵯國ㆍ子他國ㆍ散半下國ㆍ乞湌國ㆍ稔禮國 合十國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식민사학자는 《일본서기》에 흠명천황(欽明天皇) 23년(562)에, 신라가 임나(任那)의 10국은 일부 의견이 상이하지만, 보편적으로 비정한 곳은 다음과 같이 마구잡이로 한반도에 비정하였다.
△특히 임나 사이기국(斯二岐國)과 임나 산반하국(散半下國)은 우륵(于勒)의 고향인 청풍 성열현(省熱縣)과 백제의 성열성(省熱城)을 임나제국으로 끌어 들이는 동시에 우륵의 12곡을 왜국의 임나 식민지 토착화에 악용하면서 대가야연맹으로 변조하여 전라도 지역까지 확산시켰다.
○임나 가라국(加羅國)은 고령으로 왜곡 ☛ 본디 대가야이다.
○임나 안라국(安羅國)은 함안으로 왜곡 ☛ 본디 아라가야이다.
○임나 사이기국(斯二岐國)은 의령으로 왜곡 ☛ 본디 초팔국이다.
○임나 다라국(多羅國)은 합천으로 왜곡 ☛ 본디 초팔국이다.
○임나 졸마국(卒麻國)은 생림(生林)으로 왜곡 ☛ 본디 가락국이다.
○임나 고차국(古嵯國)은 고성(固城)으로 왜곡 ☛ 본디 소가야(小伽耶)이다.
○임나 자타국(子他國)은 거창으로 왜곡 ☛ 본디 신라 거열군(居烈郡)[거타(居陁)]이다.
○임나 산반하국(散半下國)은 초계로 왜곡 ☛ 본디 초팔국이다.
○임나 걸찬국(乞湌國)은 단성(丹城)으로 왜곡 ☛ 본래 신라 궐지군(闕支郡)이다.
○임나 임례국(稔禮國)은 의령으로 왜곡 ☛ 본래 신라 신이현(辛尒縣)이다.
▲▲▲▲▲임나10국이 지금의 의령과 합천에 집중적으로 분포한 이유는 우륵(于勒)을 임나제국의 토착화에 악용하기 위한 목적이다.
△《삼국사기》에 성열현 사람 악사 우륵(于勒)을 《일본서기》에 임나 사이기국(斯二岐國) 사람으로 날조 왜곡하였다.
△이 과정에서 초팔국(草八國)의 강역에 정통성을 전승한 신라 초팔혜현(草八兮縣)은 통일신라 경덕왕(景德王) 때 팔계현(八谿縣)으로 개정하고, 고려시대 초계현(草谿縣)으로, 조선시대 초계군(草谿郡)으로, 1914년 합천군 초계면(草谿面)으로 통폐합되었다.
△이에 지금의 합천군에 속한 예 초팔국의 강역에 임나 ○사이기국(斯二岐國), ○다라국(多羅國), ○산반하국(散半下國), ○임례국(稔禮國)으로 집중한 것이다.
△이것도 왜국의 식민지 역사침략에 미덥지 않은지, 한국 비른 역사를 재기할 수 없도록 왜국의 임나를 토착시키기 위하여 우륵(于勒)의 12곡명 가운데 이사(爾赦) 곡명을 사이기국(斯二岐國)으로 끌어 들이면서 우륵은 철저하게 임나의 식민역사 토착화에 악용했다.
△또한 지금의 청풍 성열성(省熱城)을 신라 신이현(辛尒縣)으로 끌어들이고, 의령군에서 초팔국(草八國)의 강역에 조선시대 미타산성을 백제 성열성(省熱城)으로 조작하기 이르렀다.
▲한반도에 임나국이 존재하지 않은 결정적인 증거는 562년 이후에
△《일본서기》에 추고천황(推古天皇) 31년(623)에, “是歲, 新羅伐任那, 任那附新羅”에서 “이 해에 신라가 임나를 토벌하였다. 임나는 신라에 부용하였다.”하여 562년 임나십국이 멸망한 이후에도 여전히 신라와 임나가 등장한 것은 한반도에 임나가 존재하지 않았던 증거이다.
【결론】
△현재 가야고분군을 유네스코에 등재하려는 준비 단계에서 합천에 임나 다라국(多羅國)과 남원에 임나 기문국(己汶國)을 삭제하라는 애국시민운동이 전개되고 있지만, 직접 관련 한 경상도 각 기관에서는 피동적이다.
△경상남도의 정체성이 담긴 《경상남도사(慶尙南道史)》의 연표를 분석한 결과 《일본서기》에 실린 임나 관련 기사를 한국 역사에 등재한 사실을 발견하고 검토한 결과,
△100% 한반도에 왜국의 식민지를 정설로 수용한 사실이 적나라하게 적시하여 정체성의 근간을 훼손하고 있는 것을 간과할 수 없다.
△이에 《경상남도사(慶尙南道史)》의 연표는 《일본서기》에 의거하여 임나의 식민지 역사를 한국 역사에 삽입한 것은 일괄 삭제할 필요성이 대두된다.
△《경상남도사(慶尙南道史)》의 판권에 연표는 2명이 집필한 것으로 나타나 경남 도민 전체의 의견수렴으로 볼 수 없지만, 경상남도지사가 발행인이고, 편찬위원장 1명, 편찬책임위원 2명, 감수위원 전 국사편찬위원장 포함 4명, 편찬위원 18명 등이 경상남도의 정체성을 수립하기 위한 도사(道史)를 편찬했다. 이 과정에서 경상남도의 정체성을 저해하는 부분이 있다면 과감하게 삭제가 요구된다.
○역사를 빼앗기는 것과 역사를 내어주는 것은 큰 차이가 난다.
○역사를 빼앗기는 것은 강탈이며, 역사를 내어주는 것은 무조건 주권을 양위하는 것이다.
○역사를 빼앗기면 절치부심 다시 찾을 수 있지만, 역사를 내손으로 무조건 내어주면 다시는 찾기가 어렵다.
○한국 역사를 통째로 왜국에 무조건 바치는 식민사학자의 소행으로 인하여 한국의 주권을 왜국에 양위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일본은 총 한방 쏘지도 않으면서 한국은 고대로부터 왜국의 식민지라는 사실을 한국의 학술기관과 사학계에서 공인한 결과 그 정한론(征韓論)의 발발은 불을 보듯 뻔하다.
○《경상남도사(慶尙南道史)》의 연표 중에는 분명히 왜국의 식민속국인 임나를 정설로 수용한 내용을 대거 기술했기 때문에 국가적인 명제로 왜국의 임나 관련 연표를 삭제시켜야 한다.
【첨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5가야는
○아라가야(阿羅伽耶)[阿耶伽耶]는 지금의 함안(咸安)으로
○고녕가야(古寧伽耶)는 지금의 함령(咸寧)으로
○대가야(大伽耶)는 지금의 고령(髙霊)으로
○성산가야(星山伽耶)는 지금의 경산(京山) 또는 벽진(碧珎)으로
○소가야(小伽耶)은 지금의 고성(固城)이 정석이다.
이상 5가야는 종주국인 가락국을 포함하여 6가야이다.
◎고려 태조(太祖) 5년(940)에 개정한 5가야의 명칭으로
○금관(金官)은 금해부(金海府)로
○고녕(古寧)은 가리현(加利縣)으로
○비화(非火)는 지금의 창녕(昌寧)은 고령의 와전이 의심된다.
○한안은 아라가야(阿羅伽耶)이다.
○성산(星山)은 벽진가야(碧珍伽耶)이다.
▲이상에서 고려 왕조에서 5가야를 정립하면서 비화(非火)는 고령이 와전된 것으로 의심하였으나 실존한 가야유적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상기 가야의 분포에서 남해안 고성(固城)에 위치한 소가야(小伽耶)는 임나일본부설이 한반도에 존재하지 않은 증거이다.
▲한국의 정통성으로 함안 아라가야 고분에서 출토한 남두육성의 별자리와 창녕 고분에서 출토한 칠석과 이형토기는 단군조선의 삼한시대 정체성을 지닌 천체의 북두칠성 묘제문화에서 천체에 미개한 왜국의 식민지 임나일본부설은 추호도 개입할 여지가 없다.
▲특히 왜구의 해적선이 빈번하게 노략질한 남해안의 포구인 고성 소가야의 문화권역에 송학동 고분군에 고인돌은 1997년 고성군 두모마을에 옮긴 것으로 덮개돌에 새긴 30여 개의 별무리 가운데 북두칠성은 단군조선의 천체문화를 전승한 것이다.
▲임나는 한반도에 개입할 수 없는 단군조선 삼한의 정체성인 천체 영성의 칠성문화의 유적과 유물은 왜국의 임나일본부설은 개입할 수 없는 허구성을 반증한다.
▲고려시대 왜구(倭寇)의 해적선은 3면의 바다에 정박할 수 있는 곳은 야만인과 같이 노략질을 전개한 분포도를 통하여 경상도 지역에서 가장 많은 피해를 발생한 것으로 소명된다.
[첨부 사진 출처]
◼경남 고성군 고인돌 [출처] 방방콕콕(bbkk.kr)
◼함안박물관 함안말이산고분군 25호분 굽다리등잔 [출처] 아라가야 토기문화 정수 ‘세상 나들이’ - 경남매일(gnmaeil.com). 재인용.
◼함안 말이산 13호 고분 덮개돌 별자리 남두육성 [출처] 문화재청
◼창녕군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 63호분 [출처] 국립문화재연구소,
창녕군, 사적 제514호 교동ㆍ송현동 고분군 발굴현장 공개 : 100세시대의 동반자 브릿지경제(viva100.com), 재인용.
◼고구려 왜구 노략질 [출처] KBS 국권침탈 100년 특별기획 한국과 일본 2부 적대, 캡처.
사진 1. 가야 권역 왜국의 임나일본부설을 개입할 수 없는 한국 영성 북두칠성의 천제문화
대한민국 국민 류금열
2021-10-19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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