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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침묵의 세대: 퀘벡의 프랑스계 주민과 7년 전쟁 이후의 역사 연대기

해머슴 2025. 6. 30. 10:23

1. 함락의 계절 – 1759년 퀘벡 전투


1759년 가을, 아브라함 평원에서 벌어진 퀘벡 전투는 북미 대륙의 향방을 바꿨다. 프랑스군은 영국군 제임스 울프 장군에게 패했고, 뉴프랑스의 수도 퀘벡은 영국령이 되었다. 이 시점부터 60,000명에 이르는 프랑스계 캐나다 주민들은 단숨에 패전 민족이자 침묵해야 할 백성이 되었다. 군정 하에서 이들은 언어, 종교, 법의 영역에서 침묵을 강요당했다.

 

2. 군정의 세대 – 1760~1774년의 통제기


전쟁이 끝난 후에도 퀘벡은 총독령 식민지로 군사적 통치를 받았다. 프랑스어는 공문서에서 사라졌고, 가톨릭 교회는 조세권을 박탈당했으며, 자녀 교육은 성공회 계열로 전환되었다. 시민 참여는 불허되었고, 대부분의 프랑스계 주민은 법의 객체일 뿐 주체가 될 수 없었다. 침묵은 생존의 방식이 되었고, 이 세대는 교육 대신 억눌린 기억을 유산으로 물려주었다.

 

3. 유예된 관용 – 퀘벡법(1774)


그러나 1774년, 미국 독립 전운이 감도는 가운데 영국은 퀘벡법(Quebec Act)을 통해 프랑스계 주민들에게 종교의 자유, 프랑스 민법의 일부 회복, 교회 세금 부활을 허용한다. 이는 진정한 권리 회복이라기보다, 반란 방지를 위한 전략적 회유였다. 프랑스계 주민은 말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 말은 제국의 승인 하에서만 가능했다. 이 세대는 여전히 정치적으로 침묵해야 했다.

 

4. 침묵의 유산 – 케이준 디아스포라


침묵은 대서양을 넘어 흩어졌다. 1755~1764년 사이, 강제추방된 아카디안은 루이지애나로 이주해 케이준 문화를 형성했다. 그들은 추방과 재정착의 과정에서도 이름을 바꾸고 언어를 접었다. 이들의 후손들은 프랑스어 악센트를 남긴 채, 침묵 속에 정체성을 새겼다. 침묵은 더 이상 억압만이 아니라, 생존과 기억의 전략이기도 했다.

 

5. 병렬의 역사 – 동시대 조선, 그리고 '묵언의 백성들'


같은 시기 조선은 영조의 탕평책이 마무리되고, 정조의 개혁 전야에 접어들고 있었다(1760~1776년). 서학이 은밀히 유입되었고, 사도세자의 비극은 말로 표현되지 못한 정치적 침묵을 낳았다. 퀘벡의 침묵의 세대와 조선의 묵언의 사대부와 백성들은 말하지 못한 기억으로 역사의 밑그림을 공유하고 있었다. 세계는 전쟁과 개혁, 침묵과 저항 사이에서 겹쳐지고 있었다.


⏳ 동기화 표: 세계사 vs 한국사

연도세계사 사건 (영국-프랑스)한국사 동시 사건 (조선 후기)
1756 7년 전쟁 발발 영조, 균역법 시행 직후 안정기
1759 퀘벡 전투, 프랑스 패배 정순왕후 출생, 노론 강화
1760 퀘벡 총독 James Murray 군정 시작 사도세자 비극 전야
1763 파리조약, 프랑스령 캐나다 몰락 정조 출생 (1752), 즉위 전 준비기
1774 퀘벡법 통과, 문화 관용 회복 사도세자 사망(1762), 정조의 성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