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갈무리] 문화재청 자유게시판 - 왜구시말(倭寇始末) 왜국 최초 거제(巨濟)의 점거 시원 임나일본부설 왜곡명백

해머슴 2023. 1. 14. 07:11

왜구시말(倭寇始末) 왜국 최초 거제(巨濟)의 점거 시원 임나일본부설 왜곡명백

고대 왜국에서 한반도 식민지 경영의 역사 왜곡은 영토의 점령 여부는 역사의 연속성과 정통성을 지닌 고려시대 《고려사》에 의거하여 왜국의 한반도 신민지 임나일본부설의 허구성을 소명할 수 있다.

한국은 고대로부터 문물이 발전하여 후진국인 왜국에 선진문물을 전파하면서 국제교류가 발생하면서 문화면에 동질성을 보이면서 한국에 지명에 일본 열도에 산재하였다.

역사와 문화는 한 왕조가 멸망하여도 그 지역에는 원주민이 거주하면서 전통문화를 전승하면서 외래인의 문화를 습합하면서 발전하기도 하는데, 고대에 왜국은 한반도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왜국에서 삼한을 식민지배한 식민사학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속속들이 한국역사에 침투하여 토착시키고 있다.

《일본서기》에 왜국(倭國)의 국호는 670년에 개정한 사실에서 안라일본부와 임나일본부의 일본(日本)의 국명은 본디 왜국이 명백 한반도에 왜국의 식민지 경영이 부합할 수 없다.

《삼국사기》, 《고려사》, 《조선왕조실록》등지에서 일본의 국호를 사용하는 동시에 왜(倭), 왜국(倭國), 왜군(倭軍), 왜구(倭寇), 왜노(倭奴) 등의 용어를 빈번하게 사용한 사실에서 해상국가로 해적선을 이용하여 노략질을 일삼으면서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한국은 피해를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이에 왜국이 한반도에 영토를 언제 어디를 점령했는가의 역사적인 진실은 《고려사》에 고려와 일본의 외교관계의 사료를 제시하여 소명하고자 한다. 역사는 시대가 흐르면서 선진문물을 수용하면서 발전하기 때문에 전조에 문화와 국방 등을 유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려사》에 고려와 일본의 외교관계를 통하여 한반도에 임나일본부설의 실존 여부를 검증할 수 있는 자료를 제시한다.

【《고려사(高麗史)》원(元)나라 내정간섭과 일본과 외교관계 주요 내용 요약】

○999년 10월, 일본국(日本國) 사람 20호 내투(來投)하였다.

○1012년 8월 3일, 일본국(日本國) 35인 내투(來投)하였다.

○1019년 4월 29일, 해적의 배 8척을 포획 일본인(日本人) 포로 남녀 259인 그들의 나라로 압송하게 하였다.

○1039년 5월 10일, 일본 사람 26명이 와서 의탁하였다.

○1082년 11월 9일, 일본국(日本國) 대마도(對馬島)에서 사신 토산물을 바쳤다.

○1033년 3월 6일, 해적이 간성현(杆城縣) 백석포(白石浦) 50인을 사로잡아 바쳤다.

○1033년 4월 27일, 해적이 삼척현(三陟縣)에 침입하여 40여 인을 사로잡았다.

○1051년 7월 11일, 일본(日本) 대마도(對馬島)에서 죄인 3인을 압송해왔다.

○1056년 10월 1일, 일본국(日本國) 사신 30인 금주(金州)에 숙박하였다.

○1073년 7월 5일, 일본국(日本國) 사람 42인이 나전(螺鈿)ㆍ안교(鞍橋)ㆍ칼[刀]ㆍ경갑(鏡匣)ㆍ연상(硯箱)ㆍ빗[櫛]ㆍ서안(書案)ㆍ화병(畵屛)ㆍ향로ㆍ활과 화살[弓箭]ㆍ수은ㆍ나갑(螺甲) 등 진상을 허락하였다.

○1074년 2월 2일, 일본국(日本國) 선장[船頭] 등 39인이 토산물을 바쳤다.

○1079년 11월 5일, 일본 상객이 법라(法螺) 30매(枚)와 해조(海藻) 300속(束)을 흥왕사(興王寺)에 시주하고 왕의 장수를 빌었다.

○1080년 윤9월 11일, 일본국 살마주(薩摩州)에서 사신을 보내서 토산물을 바쳤다.

○1082년 11월 9일, 일본국(日本國) 대마도(對馬島)에서 토산물[方物]을 바쳤다.

○1083년 8월, 왜가 바다를 건너 보배를 바쳤다.

○1084년 6월 20일, 일본국(日本國) 축전주(筑前州)의 상객(商客)이 수은(水銀) 250근을 바쳤다.

○1087년 3월 20일, 일본(日本) 상인 32인이 토산물을 바쳤다.

○1087년 7월 21, 일본국(日本國) 대마도(對馬島)에서 40인이 진주(眞珠), 수은(水銀), 보도(寶刀), 우마(牛馬) 등을 바쳤다.

○1089년 8월 19, 일본국(日本國) 대재부(大宰府) 상인이 수은(水銀), 진주(眞珠), 궁전(弓箭), 도검(刀劒)을 바쳤다.

○1093년 7월 8일, 연평도(延平島) 바다에서 배 한 척을 나포, 송인(宋人) 12명과 왜인(倭人) 19명이 타고 있었는데, 활과 화살, 도검(刀劍), 갑주(甲冑) 및 수은(水銀), 진주(眞珠), 유황(硫黃), 법라(法螺) 등의 물건이 있었다.

○1116년 2월 2일, 일본국(日本國)에서 감자(柑子)를 바쳤다.

○1147년 8월 13일, 일본(日本)에서 21인이 왔다.

○1216년 2월 6일, 일본국의 승려가 와서 불법(佛法)을 구하였다.

▲▲▲▲▲고려 건국 태조 왕건(재위 918-943)은 고구려의 정통성을 계승하는 동시에 삼국의 문화가 발전한 통일신라의 찬란한 문화의 기반에서 문물의 황금기를 구가하면서 자연히 일본에서 상인의 교역이 증가하고 고려에 투항한 왜국인이 증가하였다.

○1223년 5월 22일, 왜구(倭寇)가 금주(金州)[김해]를 노략질하였다.

○1225년 4월 8일, 왜선(倭船) 2척이 경상도 연해의 주현(州縣)을 노략질하였다.

○1226년 6월 1일, 왜(倭)가 금주(金州)를 침략했다.

○1227년 1월 27일, 왜(倭)가 경상도(慶尙道) 연해 주군(州郡)을 침략, 거제현령(巨濟縣令)이 사도(沙島)에서 싸워 2명의 목을 베자 달아났다.

○1227년 4월 15일에 왜(倭)가 금주(金州)를 침략, 적선(賊船) 2척을 포획 30여 명을 참수하고, 노획한 무기를 바쳤다.

○1227년 5월 17일, 일본국(日本國)이 적선(賊船)이 변방을 침략한 죄를 사과, 외교관계와 교역을 요청하였다.

○1227년 일본이 왜적(倭賊)을 찾아 죽여서 왜적의 침략이 다소 줄어들었다.

▲▲▲▲▲1223년 5월 22일 왜구(倭寇)가 금주(金州)[김해]를 노략질하면서 1227년 5월 17일에 적선의 침략을 사과하여 외교 관계가 완전히 단절하지는 않았다.

○1243년 9월 29일, 일본국에서 토산물을 바치고, 표류한 사람을 돌려보냈다.

○1251년 11월, 금주(金州)에 축성하여 왜구를 방비하였다.

▲▲▲▲▲1227년부터 1243년까지 왜국의 노략질을 소진되었으나 1251년에 금주(金州)[김해]에서 왜국의 기습침략에 성곽을 구축하였다.

○1260년 7월 28일, 일본(日本)에 파견하여 해적의 금지를 요청하였다.

○1260년 2월 2일, 제주(濟州)는 바다 바깥에 있는 큰 진(鎭)이므로 송(宋) 상인과 섬나라 왜인(倭人)이 무시로 왕래하기 때문에 특별히 방호별감(防護別監)을 파견하여 비상시를 대비해야 한다고 하였다.

○1263년 2월 23일, 왜구(倭寇)가 웅신현(熊神縣) 물도(勿島)와 여러 주현(州縣)의 공물(貢物) 수송선을 약탈하였다.

○1263년 4월 5일, 일본국(日本國)에 파견하여 해적의 금지를 요청하였다.

○1263년 7월 27일, 일본의 상선(商船) 30인이 풍랑을 만나 구주(龜州) 애도(艾島)에 도착 호송해 보내라고 명령하였다.

○1263년 8월 1일, 해적을 끝까지 추적해보니 바로 대마도(對馬島)의 왜(倭)였다.

○1265년 7월 1일, 왜구가 남쪽 바닷가의 주군(州郡)을 침략하여 삼별초(三別抄) 군사가 방어하게 하였다.

○1267년 1월, 일본은 본래 우리나라와 외교관계를 맺지 않았으며, 대마도 사람들이 때때로 무역하기 위하여 금주(金州)를 왕래할 뿐이었다.

○1267년 8월 1일, 몽고 황제가 선유(宣諭)하였다.

○1267년 8월 22일, 몽고의 국서(國書)와 우리나라의 국서를 가지고 일본으로 가게 하였다.

○1267년 11월 11일, 반부(潘阜)를 다시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하였다고 보고하였다.

○1268년 12월 4일,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신사전(申思佺) 등 일본으로 보냈다.

○1269년 3월 16일, 신사전(申思佺) 등 대마도에 도착하여 왜인(倭人) 2인을 잡아서 돌아왔다.

○1269년 5월 15일, 일본이 병선(兵船)을 준비하여 장차 우리나라를 침범한다는 급보가 있었다.

○1269년 7월 20일, 몽고 사신 6인이 왜인과 함께 오자, 왕창(王淐)이 교외에 나가서 영접하였다.

○1270년 12월 20일, 조서(詔書)에서 ‘전에는 일본이 해마다 고려에 조공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1271년 1월 12일, 조서(詔書)에서 예전에는 송(宋)의 상선(商船)이 왕래하였으나 최근 10년간은 온 것을 보지 못하였다.

○1271년 1월 15일, 몽고(蒙古)가 일본국신사(日本國信使) 등 40인을 보냈다.

○1271년 3월, 몽고(蒙古) 조서(詔書)에서 짐이 일찍이 사신을 파견하여 일본(日本)에게 통교하자고 설득하였으나, 설득하기는 어렵게 되어 저들을 공격하여 취할 계획으로 군수물자를 조달하였다.

▲▲▲▲▲1260년 7월 28일 일본(日本)에 해적을 금지하였으나 여전히 남해안 주현(州縣)의 공물(貢物) 수송선을 약탈하는 사건이 발생한 왜구의 소굴은 대마도에서 남해안에 출몰하여 약탈한 것으로 나타났다. 1267년 당시 일본과 고려는 정식 외교는 성립하지 않았으나 상인이 교역이 있었다. 고려는 몽고항쟁과 왕조의 존속을 위한 존망의 기로에서 일본은 고려를 침략하기 위하여 병선(兵船)을 준비하고 있었다.

○1271년 3월, 황제가 일본 정벌에 관한 일을 전하였다.

○1272년 1월 18일, 일본 사신 12인을 데리고 원(元)으로 가게 하였다.

○1272년 2월 10일, 일본 정벌을 구실로 삼아 황제에게 청하여 돌아가자고 세자[고려 25대 충렬왕(忠烈王)[재위 1274-1298, 복위 1298-1308]에게 권하였다. 세자의 변발(辮髮)과 오랑캐 옷차림[胡服]을 보고 모두 탄식하였다.

○1273년 3월 20일, 조양필(趙良弼)이 일본(日本)에 가서 대재부(大宰府)에 도착하였지만, 그 나라 수도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왔다.

○1274년 1월, 원(元)이 전함(戰艦) 300척 건조에 필요한 공장(工匠)과 일꾼 및 일체의 물자를 완전히 고려(高麗)가 부담하도록 위임하였다.

○1274년 3월 9일, 전함(戰艦)을 만드는 일꾼 30,500여 명 감독군에 대한 식량 공급이 부족하였다.

○1274년 5월 14일, 원(元)의 일본(日本) 원정군 15,000인이 왔다.

○1274년 5월 21일, 일본(日本) 정벌군을 더 뽑으라고 하였다.

○1274년 7월 12일, 김방경(金方慶)이 일본을 정벌하는 선봉별초(先鋒別抄)를 거느리고 원정길에 올랐다.

○1274년 8월 6일, 원(元)에서 경군(京軍) 458인을 추가로 동원하라고 하였다.

○1274년 10월 3일, 몽한군(蒙漢軍) 25,000명, 아군(我軍) 8,000명, 초공(梢工)ㆍ인해(引海)ㆍ수수(水手) 6,700명, 전함(戰艦) 900여 척을 거느리고 일본을 정벌하게 하였다. 일기도(一岐島)에서 밤에 폭풍우가 불어서 전함이 부서졌다.

○1274년 11월 27일, 동정(東征) 갔던 군사들이 합포(合浦)로 돌아왔다.

○1275년 1월 8일, 원(元)에 표문(表文)을 올려 일본을 정벌하는데 난관을 호소하였다.

○1275년 10월 25일, 원(元)이 다시 일본(日本)을 정벌하려고 전함(戰艦)을 수리하고 건조하게 하였다.

○1277년 2월 8일, 원(元)에 상서(上書)에 일본을 정벌할 때마다 대군(大軍)의 군량을 모두 백성들에게 부과 징수의 문제를 호소하였다.

○1278년 7월 3일, 왕이 일본(日本)은 일개 섬 오랑캐일 뿐인데 지세가 험한 것을 믿고 입조(入朝)하지 않고 감히 천자의 군대에 항거하고 있다고 하였다.

▲▲▲▲▲원(元)나라의 부마국으로 내정간섭을 받았던 고려 조정은 전쟁에 소요하는 전함(戰艦)을 건조하고 군인을 징발하고 군량미를 수거하여 전투에 임했으나 원나라 군사와 더불어 태풍으로 인하여 참혹하게 실패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충렬왕은 일개 섬 오랑캐로 폄훼하면서 재차 일본 정벌의 당위성을 주장했다.

○1278년 7월 17일, 상국(上國)의 법대로 호구(戶口) 조사를 할 수 있기를 청하였다.

○1279년 6월 25일, 중서성(中書省)의 지시로 전함(戰艦) 900척을 건조하라고 하였다.

○1280년 5월 3일, 왜적(倭賊)이 고성(固城) 칠포(漆浦)에 들어와 어부들을 붙잡아 가서 원(元)에 보고하였다.

○1280년 5월, 황제가 우리나라의 군졸로 왜적(倭賊)을 방어하라고 칙명(勅命)을 내렸다.

○1280년 8월 26일, 왕이 박의(朴義)를 시켜서 상주하기를, “일본 정벌[東征]의 일은 신(臣)이 입조(入朝)하여 직접 명령을 받겠습니다.”라고 하여 황제가 허락하였다.

○1280년 9월 17일, 군량의 저축, 전함(戰艦), 뱃사공[梢工], 선원[水手] 등 일체의 군수품은 법에 따라 준비하였다가 사용하게 하였다.

○1280년 9월 28일, 원(元)이 수달단족(水韃靼族)을 동녕부(東寧府)로 이주시켰는데, 장차 일본 정벌[東征]에 동원하려고 한 것이었다.

○1280년 10월, 이달에 원(元)의 첩문(牒文)에 황제의 명령을 받들어 일본국(日本國)을 정벌하게 되었다.

○1280년 11월 11, 중서성(中書省)에 상서(上書)에서 우리나라에서 이미 병선(兵船) 900척, 초공(梢工)ㆍ수수(水手) 15,000명, 정군(正軍) 10,000명, 군량(軍糧)은 한석(漢石)으로 계산하여 110,000석을 준비하여 성덕(聖德)에 보답하려고 하였다.

○1280년 11월 22일, 동정군사(東征軍士)를 사열하였다.

○1281년 1월 20일, 개원로(開元路) 동녕부(東寧府)에서 일본 정벌의 일로 사신을 보내왔다.

○1281년 3월 17일, 원수(元帥) 등은 군사를 거느리고 합포(合浦)로 향하였다.

○1281년 3월 19일, 원(元)에서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에서 우승(右丞) 흔도(忻都, 힌두)와 홍다구(洪茶丘)를 보내왔다.

○1281년 3월 21일, 왕이 흔도(忻都, 힌두)ㆍ홍다구(洪茶丘, 홍차구)와 함께 일본 정벌에 관한 일을 의논하였다. 흔도 등이 합포(合浦)로 갔다.

○1281년 5월 4일, 수군을 거느리고 일본 정벌에 나섰다.

○1281년 5월 29일, 모든 군대가 일기도(一岐島)로 향하여 출발, 선군(船軍) 113명과 뱃사공[梢工] 36명이 풍랑을 만나 행방불명이 되었다

○1281년 6월 8일, 전함(戰艦) 3,500척에 만군(蠻軍) 10여 만 명을 거느리고 오다가 태풍을 만나 만군이 모두 익사하였다.

○1281년 8월 16일, 일본 정벌군[東征軍]이 패하고 원수(元帥)들이 합포로 돌아왔다고 보고하였다.

○1281년 8월, 관군(官軍) 중에 돌아오지 못한 자가 무려 10만여 명이나 되었다.

○1281년 11월 20일, 동정군(東征軍) 9,960명, 뱃사공[梢工]과 선원[水手] 17,029명 중에 살아 돌아온 자가 19,397명입니다.

○1282년 6월 1일, 만군총파(蠻軍摠破) 심총(沈聰) 등 6인이 일본으로부터 도망해 와서 “군사 무리 13~14만 명이 함께 어떤 산으로 옮겼는데, 10월 초8일에 일본군이 오자 우리 군사는 굶주려서 싸우지도 못하고 모두 항복하였습니다.”

○1282년 8월 8일, 갑오 만군(蠻軍) 5인이 일본에서 도망쳐왔다.

○1283년 1월 20일, 원(元)에 파견하여 일본 정벌[東征] 일의 진행 상황을 탐지하게 하였는데, 평만주(平灣州)에 이르러 전함(戰艦)을 수리하는 것을 보고 이에 돌아왔다.

○1283년 5월 26년, 황제께서 일본 정벌[東征] 계획을 중지시켰다.

○1285년 11월 18일, 원(元)에서 단사관(斷事官) 소독해(蘇獨海)를 보내와 시찰하고, 아울러 일본을 정벌[東征]할 함선의 건조 상황을 감독하게 하였다.

○1285년 12월 4일, 원(元)에서 함선의 건조 상황을 감독, 군병(軍兵)ㆍ초공(梢工)ㆍ수수(水手)의 명단을 보고하라고 하였다.

○1285년 12월 30일, 원(元)에서 군량(軍粮) 100,000석(石)을 징발하게 하였다.

○1286년 1월 19일, 원(元)이 사신을 파견하여 대사면령을 내리고 일본 정벌[東征]을 중지하였다.

▲▲▲▲▲원나라의 간섭으로 고려는 전쟁에 소요하는 물자와 인력을 지원한 결과 일본 원정은 실패하면서 왜구(倭寇)의 시말은 상황이 종료한 것이다. 즉, 왜구가 고려에 침략한 것이 최초이며, 원나라 간섭으로 인한 일본 원정에서 태풍으로 일본 정벌은 중지한 것은 사실 실패한 것이다.

<자료 1>【고려사 원나라 내정간섭기 고려와 일본의 대외 외교 및 군사 주요 내용】[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관련 자료 전재하면서 ▲부기하였다.

○《고려사》고려 목종(穆宗) 2년(999) 10월, 일본국(日本國) 사람 도요미도(道要彌刀) 등 20호가 내투(來投)하였다. 그들을 이천군(利川郡)에 거주하게 하고 편호(編戶)로 삼았다.

▲999년 일본(日本) 사람을 남해안에 거주하게 하지 않고, 경기도 이천군(利川郡)에 살게 한 것은 왜국에 왜인의 접근성을 차단하기 위한 의도로 보인다.

○《고려사》고려 현종(顯宗) 3년(1012) 8월 3일, 일본국(日本國)의 반다(潘多) 등 35인이 내투(來投)하였다.

▲1012년 일본국(日本國)의 반다(潘多) 등이 고려에 의탁한 것은 그 당시 일본은 후진국으로 반증된다.

○《고려사》고려 현종(顯宗) 10년(1019) 4월 29일, 진명(鎭溟)의 선병도부서(船兵都部署) 장위남(張渭男) 등이 해적의 배 8척을 포획하여, 해적에게 사로잡혀 있던 일본인(日本人) 포로 남녀 259인을 공역령(供驛令) 정자량(鄭子良)을 보내 그들의 나라로 압송하게 하였다.

▲1019년 해적(海賊)의 배안에 일본인(日本人) 남녀 259인의 포로를 귀국시킨 것으로 보아서 그 당시 일본은 열도에 완전한 중앙집권체제를 형성하지 않아서 노략질로 일삼은 것을 반증한다.

○《고려사》고려 현종(顯宗) 20년(1029) 7월 28일, 탐라(耽羅) 백성 정일(貞一) 등이 일본(日本)에서 돌아왔다. 과거에 정일 등 21인이 바다를 건너다가 바람에 떠내려가 동남쪽의 지극히 먼 섬에 도착하였다. 섬사람들은 키가 크고 덩치도 컸으며 온 몸에 털이 나고 언어가 달랐는데, 7개월 동안 위협을 당하며 억류되어 있었다. 정일 등 7인이 작은 배를 훔쳐 동북쪽으로 가서 일본 나사부(那沙府)에 이르러서, 그리하여 살아서 돌아올 수 있었다.

▲1029년 고려에 속한 탐라(耽羅)의 백성이 동남쪽으로 표류한 섬은 남반구로 여겨진다.

○《고려사》고려 정종(靖宗) 2년(1036) 7월 16일, 일본국(日本國)이 우리나라 사람인 표류민 겸준(謙俊) 등 11인을 돌려보냈다.

▲1036년 일본국(日本國)에서 태풍에 표류한 백성을 인도적으로 고려에 귀환시킨 것은 우호관계가 형성한 반증이다.

○《고려사》고려 정종(靖宗) 5년(1039) 5월 10일, 일본 사람 26명이 와서 의탁하였다.

▲1039년 일본 사람이 고려에 의탁한 것은 일본에 비하여 고려가 선진국임을 반증한다.

○《고려사》고려 문종(文宗) 36년(1082) 11월 9일, 일본국(日本國) 대마도(對馬島)에서 사신을 보내 토산물[方物]을 바쳤다.

▲1082년 일본국(日本國) 대마도(對馬島)에서 고려 조정에 토산물을 헌상한 것은 상국의 지위를 반증한다.

○《고려사절요》고려 문종(文宗) 37년(1083) 8월 10일, 송(宋) 조정에서는 매번 포상하는 명을 내렸고, 요[遼氏]는 해마다 생신을 축하하는 예를 차렸으며, 동쪽에서는 왜(倭)가 바다를 건너 보배를 헌상하였고, 북쪽에서는 오랑캐들이 관문을 두드려 집터를 받았다. 그러므로 임완(林完)은 우리 조정의 어질고 성스러운 군주라고 하였다.

▲1083년 고려의 문물이 발전한 황금기에 송(宋)나라 다음으로 요(遼)나라가 예를 갖추며, 왜(倭)는 일본으로 국호를 변경했어도 낙후된 왜국으로 여겼다.

○《고려사》고려 덕종(德宗) 2년(1033) 3월 6일 해적이 간성현(杆城縣) 백석포(白石浦)에 쳐들어오자, 〈해적〉50인을 사로잡아 바쳤다.

▲1033년 강원도 동해안 간성현(杆城縣)에 해적을 포로로 잡은 것은 왜구인지 북쪽의 오랑캐인지 알 수 없으나 고려의 군사력은 철통수비를 보여준다.

○《고려사》고려 덕종(德宗) 2년(1033) 4월 27일, 해적이 삼척현(三陟縣)에 침입하였는데, 40여 인을 사로잡았다.

▲1033년 강원도 동해안 삼척현(三陟縣)에 왜국의 해적질은 《삼국사기》에 동해안으로 빈번하게 왜구가 노략질한 사료에서 보듯이 고려 왕조에서도 지속된 것을 보여준다.

○《고려사》고려 문종(文宗) 3년(1049) 11월 29일, 동남해선병도부서사(東南海船兵都部署司)가 아뢰기를, “일본(日本) 대마도(對馬島) 관청에서 수령(首領) 명임(明任) 등을 보내어, 우리나라 사람으로 태풍으로 표류했던 김효(金孝) 등 20인을 압송하여 금주(金州)에 이르렀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명임(明任) 등에게 예물을 하사하되 차등 있게 하였다.

▲1049년 일본(日本) 대마도(對馬島) 수령(首領)이 고려 사람의 난민을 금주(金州)에 데리고 온 것에 예물로 사례하여 우호관계를 보였다. 지금의 김해는 해안가에 대마도로 통하는 포구이다.

○《고려사》고려 문종(文宗) 5년(1051) 7월 11일, 일본(日本) 대마도(對馬島)에서 사신을 파견하여, 죄를 짓고 도망갔던 사람 양한(良漢) 등 3인을 압송해왔다.

▲1051년 일본(日本) 대마도(對馬島)에 도피한 고려의 죄인을 압송한 것은 강대국으로서 치외법권의 영향력이 미친 것을 보여준다.

○《고려사》고려 문종(文宗) 10년(1056) 10월 1일, 일본국(日本國)에서 사신 정상위권예(正上位權隷) 등원(藤原)과 조신(朝臣) 뇌충(賴忠) 등 30인이 와서 금주(金州)에 숙박하였다.

▲1056년 일본국(日本國) 사신 일행이 금주(金州)에 숙박한 것은 국제교류가 빈번한 해상무역의 국제도시를 반영한다.

○《고려사》고려 문종(文宗) 27년(1073) 7월 5일, 동남해도부서(東南海都部署)에서 아뢰기를, “일본국(日本國) 사람 왕측정(王則貞)ㆍ송영년(松永年) 등 42인이 와서 요청하기를 나전(螺鈿)ㆍ안교(鞍橋)ㆍ칼[刀]ㆍ경갑(鏡匣)ㆍ연상(硯箱)ㆍ빗[櫛]ㆍ서안(書案)ㆍ화병(畵屛)ㆍ향로ㆍ활과 화살[弓箭]ㆍ수은ㆍ나갑(螺甲) 등 물품을 진상하려고 합니다. 일기도(壹歧島) 구당관(勾當官)이 등정안국(藤井安國) 등 33인을 보내 또한 요청하기를 동궁과 여러 대신에게 토산물을 바치려고 합니다.”라고 하자, 왕이 제서(制書)를 내려 이르기를, “바닷길을 경유하여 개경에 이르기를 허락하라.”라고 하였다.

▲1056년 당시 일본 사람이 고려 조정에 헌상하려는 토산품은 주요 수출품으로 나전(螺鈿) 공예가 발전한 것을 알 수 있다.

○《고려사》고려 문종(文宗) 28년(1074) 2월 2일, 일본국(日本國) 선장[船頭] 중리(重利) 등 39인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1074년 일본 사람 39명의 사절단이 고려 조정에 토산물을 바친 것은 내륙의 선진 문물을 교역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고려 문종(文宗) 32년(1078) 9월 1일, 일본국(日本國)에서 탐라(耽羅) 표류민[飄風民] 고려(高礪) 등 18인을 돌려보냈다.

▲1078년 일본국(日本國)에서 태풍으로 탐라(耽羅) 사람이 표류한 것을 환국시킨 것은 고대로부터 탐라(耽羅)는 한국의 영토로 인식한 것을 보여준다.

○《고려사》고려 문종(文宗) 32년(1078) 9월, 일본국(日本國)이 풍랑으로 표류해 갔던 우리나라의 상인 안광(安光) 등 44인을 돌려보냈다.

▲1078년 고려의 상인이 태풍으로 일본에 표류한 것을 환국한 인도적인 배려는 양국이 우호관계를 보여준다.

○《고려사》고려 문종(文宗) 33년(1079) 11월 5일, 일본 상객 등원(藤原) 등이 와서 법라(法螺) 30매(枚)와 해조(海藻) 300속(束)을 흥왕사(興王寺)에 시주하고 왕을 위해 장수를 빌었다.

▲1079년 일본 상인이 해산물을 흥왕사(興王寺)에 시주하여 왕의 장수를 축원한 것은 고려 11대 문종(文宗, 1019-1083)[재위 1046-1083]을 위하여 장수를 기원한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상인은 국제교역을 위하여 고려의 선진문물을 왜국에 수급을 충족하면서 신변보호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고려 문종 때 신라의 전통문화를 전승하여 문물제도의 정비하면서 고려 왕조에서 황금기를 이루었던 시대였다.

○《고려사》고려 문종(文宗) 34년(1080) 윤9월 11일, 일본국 살마주(薩摩州)에서 사신을 보내서 토산물을 바쳤다.

▲1080년 일본 서해도(西海島)인 구주(九州)에 속한 살마주(薩摩州)는 토산물을 고려에 진상한 것은 중국의 문물에 비하여 우수한 것을 반영한다.

○《고려사》고려 문종(文宗) 36년(1082) 11월 9일, 일본국(日本國) 대마도(對馬島)에서 사신을 보내 토산물[方物]을 바쳤다.

▲1082년 고려 문종(文宗)은 유불선의 정신문화와 사치품의 공예분야가 발전하면서 대마도(對馬島)에서 토산물을 바치면서 문물을 수용한 것이다.

○《고려사》고려 순종(順宗) 원년(1083) 8월, 왜가 바다를 건너 보배를 바쳤다.

▲1083년 일본의 국호를 사용하지 않고 기존에 왜(倭)의 호칭은 여전히 일본은 국제적으로 약소국이기 때문에 선진국에 보배를 헌상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고려 선종(文宗) 원년(1084) 6월 20일, 일본국(日本國) 축전주(筑前州)의 상객(商客) 신통(信通) 등이 수은(水銀) 250근을 바쳤다.

▲1084년 일본 서해도(西海島)인 구주(九州)에 속한 축전주(筑前州)에서 상인이 수은(水銀)을 헌상한 것은 반대급부로 교역에 따른 고려의 물건이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고려사》고려 선종(文宗) 4년(1087) 3월 20일, 일본(日本)의 상인 중원(重元)과 친종(親宗) 등 32인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1087년 일본(日本)의 상인이 토산물을 바치는 분주한 모습에서 고려의 수도 개성은 활력이 넘친 것은 짐작할 수 있다.

○《고려사》고려 선종(文宗) 4년(1087) 7월 21일, 동남도도부서(東南道都部署)에서 아뢰기를, “일본국(日本國) 대마도(對馬島)의 원평(元平) 등 40인이 와서 진주(眞珠), 수은(水銀), 보도(寶刀), 우마(牛馬) 등을 바쳤습니다.”라고 하였다.

▲1087년 일본국(日本國) 대마도(對馬島)에 토산품으로 진주와 우마는 전통적으로 우수한 물품으로 고려 사람이 선호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고려 선종(文宗) 6년(1089) 8월 19, 일본국(日本國) 대재부(大宰府)의 상인들이 와서 수은(水銀), 진주(眞珠), 궁전(弓箭), 도검(刀劒)을 바쳤다.

▲1089년 일본 서해도(西海島)인 구주(九州)에 속한 축전주(筑前州) 대재부(大宰府)에 속한 상인이 고려의 문물과 교역하기 위하여 헌상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고려 선종(文宗) 10년(1093) 7월 8일, 서해도안찰사(西海道按察使)가 아뢰기를,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 관할에 있는 연평도(延平島) 순검군(巡檢軍)이 바다에서 배 한 척을 나포하였는데, 송인(宋人) 12명과 왜인(倭人) 19명이 타고 있었으며 활과 화살, 도검(刀劍), 갑주(甲冑) 및 수은(水銀), 진주(眞珠), 유황(硫黃), 법라(法螺) 등의 물건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양국의 해적이 공모하여 우리나라의 변경을 침략하려 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 병장기 등의 물건은 거두어 관청에 납부하도록 하고 잡은 해적은 모두 영외(嶺外)로 유배시키며, 그 배를 잡은 군사에게는 상을 내려주시기를 요청합니다.”라고 하니, 왕이 그대로 따랐다.

▲1093년 송인(宋人) 12명과 왜인(倭人) 19명이 고려 연평도(延平島) 순검군(巡檢軍)에 나포할 당시 활과 화살, 도검(刀劍), 갑주(甲冑) 등에서 상인을 위장한 해적으로 추정된다.

○《고려사》고려 예종(睿宗) 11년(1116) 2월 2일, 일본국(日本國)에서 감자(柑子)를 바쳤다.

▲1116년 일본국(日本國)에서 헌상한 감자(柑子)는 제주도에 감귤과 같은 형태로 크기가 왜소하다.

○《고려사》고려 의종(毅宗) 원년(1147) 8월 13일, 일본(日本)의 도강(都綱) 황중문(黃仲文) 등 21인이 왔다.

▲《고려사절요》에 “1033년 8월에 송 나라 천주(泉州) 상인 도강(都綱)ㆍ임애(林藹) 등 55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라는 도강(都綱)은 일본인 동명으로 1147년 일본, 송나라, 고려는 해상교역이 발전한 것을 알 수 있다.

○《고려사》고려 의종(毅宗) 23년(1169) 1월 30일, 〈왕이〉봉향리(奉香里) 이궁(離宮)에 행차하여 여러 신하에게 잔치를 베풀었으며, 이어 송(宋) 상인들과 일본국에서 바친 완물(玩物)을 하사하였다.

▲1169년 송나라 상인과 일본에 바친 완물(玩物)을 고려 조정의 신하에게 하사한 것은 수입품으로 분류된다.

○《고려사》고려 고종(高宗) 3년(1216) 2월 6일, 일본국의 승려가 와서 불법(佛法)을 구하였다.

▲1216년 고려의 불교사상은 화려하게 승화하면서 일본국에서 불법(佛法)을 구하기 위한 발길이 이어진 것을 보여준다.

○《고려사》고려 고종(高宗) 10년(1223) 5월 22일, 왜구(倭寇)가 금주(金州)를 노략질하였다.

▲1223년 왜구(倭寇)가 금주(金州)를 노략질한 사건은 선린외교를 파탄할 수 있는 사건이다.

○《고려사》고려 고종(高宗) 12년(1225) 4월 8일, 왜선(倭船) 2척이 경상도 연해의 주현(州縣)을 노략질하므로 군대를 출동시켜서 그들을 모두 사로잡았다.

▲1225년 왜선(倭船)이 경상도 연해에 주현(州縣)을 노략질을 소탕하여 포획한 사건에서 적대감을 고취시켰다.

○《고려사》고려 고종(高宗) 13년(1226) 6월 1일, 왜(倭)가 금주(金州)를 침략했다.

▲1226년 왜(倭)가 금주(金州)를 침략한 사건에서 전통적인 선진문화의 국제도시로 입증한다.

○《고려사》고려 고종(高宗) 14년(1227) 1월 27일, 왜(倭)가 경상도(慶尙道) 연해 지역의 주군(州郡)을 침략했는데, 거제현령(巨濟縣令) 진용갑(陳龍甲)이 수군을 이끌고 사도(沙島)에서 싸워 2명의 목을 베자 적들이 밤에 달아났다.

▲▲▲1227년 왜(倭)가 경상도(慶尙道) 연해에 주군(州郡)을 침략한 사건에서 빈도수가 증가하는 것은 일본의 군사력이 증가하면서 고려와 평화공존이 파기되는 것을 의미한다.

◎《고려사》<지리> 거제현(巨濟縣)은 본래 바다에 있는 섬으로, 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 때 처음으로 상군(裳郡)을 두었다. 경덕왕(景德王) 때 거제군(巨濟郡)으로 고쳤다. 현종(顯宗) 9년(1018)에 현령(縣令)을 두었다. 원종(元宗) 12년(1271)에 왜구로 인하여 땅을 잃고 거창현(居昌縣)의 가조현(加祚縣)에 임시로 터를 잡았다. 충렬왕(忠烈王) 때 관성(管城)에 병합하였다. 얼마 후 복구하였다. 북가조음도(北加助音島)가 있다. 속현(屬縣)이 3개이다.

◎《삼국사기》<지리> 거제군(巨濟郡)은 문무왕(文武王)이 처음 상군(裳郡)을 둔 곳으로, 바다 가운데 섬이다.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도 그대로 따른다. 거느리는 현(領縣)이 셋이다. ◾아주현(鵝洲縣)은 본래 거로현(巨老縣)인데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도 그대로 따른다. ◾명진현(溟珍縣)은 본래 매진이현(買珍伊縣)인데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도 그대로 따른다. ◾남수현(南垂縣)은 본래 송변현(松邊縣)인데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은 복고되었다. [출처]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재위 661-681] 때 바다 가운데 고도(孤島)에 상군(裳郡)을 설치한 곳은 경덕왕(景德王) 때 거제군(巨濟郡)으로 개칭한 지명으로 유사 이래 일본에게 침략으로 땅을 뺏기면서 1271년 거창현(居昌縣)의 가조현(加祚縣)에 임시로 이전하였다.

◉신라 가조현(加祚縣)은

○《삼국사기》파사(婆娑) 이사금(尼師今) 8년(87) 가을 7월에 영을 내려 말하기를, “짐(朕)이 부덕함에도 이 나라를 소유하고 있는데, 서쪽으로는 백제(百濟)와 이웃하고 남쪽으로는 가야(加耶)와 접해 있다. 덕은 백성을 편안하게 할 수 없고, 위엄은 이웃 나라를 두렵게 하기에 부족하다. 마땅히 성벽과 보루를 잘 수리하여 침략에 대비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 달에 가소성(加召城)과 마두성(馬頭城)의 두 성을 축조하였다. [출처] 한국사데이터베이스

▲▲▲87년 신라가 축조한 가소성(加召城)은

○《삼국사기》<지리> 거창군(居昌郡)은 본래 거열군(居烈郡) <혹은 거타(居陁)라고 이른다.>인데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도 그대로 따른다. 거느리는 현(領縣)이 둘이다. 여선현(餘善縣)은 본래 남내현(南內縣)인데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은 감음현(感陰縣)이다. 함음현(咸陰縣)은 본래 가소현(加召縣)인데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은 복고(復古)되었다. [출처]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거창군(居昌郡)에 속한 가소현(加召縣)은 가소성(加召城)에서 연원한 지명으로 백제 성열성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따라서 지금의 거창군 가조면에 우륵의 출생지 성열현 비정은 역사 왜곡이 명백하다.

▲▲▲▲▲한국 역사의 유사이래 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이 삼국을 통일한 이후 고려 원종(元宗) 12년(1271)에 최초로 왜구에서 땅을 빼앗긴 사건을 통하여 그 이전에는 한반도에 왜구의 약탈은 빈번했으나 강토를 빼앗긴 전례가 없기 때문에 임나일본부설은 완전 조작한 것으로 증명된다.

○《고려사》고려 고종(高宗) 14년(1227) 4월 15일, 왜(倭)가 금주(金州)를 침략하자 방호별감(防護別監) 노단(盧旦)이 군대를 출동시켜서 적선(賊船) 2척을 포획하고 30여 명을 참수하고, 또 노획한 무기를 바쳤다.

▲1227년 왜구(倭寇)가 2척을 이끌고 30여 명이 금주(金州)를 침략한 사건은 영토침략의 약탈사건은 외교문제로 비화되었다.

○《고려사》고려 고종(高宗) 14년(1227) 5월 17일, 일본국(日本國)이 글을 보내어 적선(賊船)이 변방을 침략한 죄를 사과하고 아울러 외교관계를 맺고 교역[互市]하기를 요청하였다.

▲1227년 일본국(日本國)이 서신으로 외교관계를 원상회복하여 교역을 지속할 것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고려사》고려 고종(高宗) 14년(1227), 이 해에 급제한 박인(朴寅)을 파견하여 일본에 안부를 물었다[聘]. 당시 왜적(倭賊)이 주현(州縣)을 침략하여 나라에서 이를 걱정하여, 박인에게 공문[牒]을 가지고 가서 〈고려와 일본이〉대대로 우호를 맺어왔으므로 침략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설득하였다. 일본이 왜적(倭賊)을 찾아내어 죽였으므로 왜적의 침략이 다소 줄어들었다.

▲1227년 대대로 우호 관계의 단절하는 강경조치에 일본은 왜적(倭賊)을 찾아서 죽였으나 여전히 왜적의 침략은 지속된 것을 보여준다. 일본에서도 통제할 수 없는 왜적(倭賊)이 산재한 것을 시사한다.

○《고려사》고려 고종(高宗) 30년(1243) 9월 29일, 임신 금주방어관(金州防禦官)이 보고하기를, “일본국에서 토산물을 바쳤으며, 또 우리나라에서 풍랑으로 표류한 사람들을 돌려보냈습니다.”라고 하였다.

▲1243년 일본국에서 토산물을 바치는 동시에 풍랑으로 표류한 고려 사람을 환국시키면서 우호관계가 조성되었다.

○《고려사》고려 고종(高宗) 31년(1244) 2월 2일, 유사(有司)가 전 제주부사(濟州副使) 노효정(盧孝貞)과 판관(判官) 이각(李珏)이 재임시에 일본 상선이 폭풍[颶風]을 만나 제주 해역에서 난파하였는데 노효정 등이 능견(綾絹)과 은, 진주 등의 물건을 사취(私取)하였다고 탄핵하여 보고하였다. 이에 노효정에게서 은 28근, 이각에게서 은 20근을 추징하고 섬으로 유배 보냈다.

▲1244년 일본 상선이 폭풍으로 난파선에 물건을 사취(私取)한 사건으로 유배시켰다. 이 당시 일본에서 수출한 능견(綾絹)의 비단과 진주의 사치품은 고가로 보인다.

○《고려사》고려 고종(高宗) 38년(1251) 11월, 금주(金州)에 축성하여 왜구를 방비하였다.

▲1251년 금주(金州)에 축성하여 기습적인 왜구의 침략에 방비하였다. 이전에는 왜구로부터 지금의 김해는 국제교역의 창구로 왜인이 정박한 곳에서 왜구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하여 적대세력으로 방비한 단초가 되었다. 따라서 1251년 이전에는 전조의 삼국시대 낙동강 유역에 임나일본부설은 설득력이 없다.

○《고려사》고려 원종(元宗) 원년(1260) 7월 28일, 감문위녹사(監門衛錄事) 한경윤(韓景胤)과 권지직사관(權知直史館) 홍저(洪貯)를 일본(日本)에 파견하여 해적을 금지해달라고 요청하였다.

▲1260년 고려 조정에서 사신을 일본에 파견하여 왜구의 해적질을 금지할 것을 요청한 것은 해적질이 만연하여 해안가에 백성이 극도로 불안감을 보여준다.

○《고려사》고려 원종(元宗) 원년(1260) 2월 2일, 제주부사(濟州副使) 판예빈성사(判禮賓省事) 나득황(羅得璜)으로 방호사(防護使)를 겸직하게 하였다. 조정에서 의논하기를 제주(濟州)는 바다 바깥에 있는 큰 진(鎭)이므로 송(宋) 상인과 섬나라 왜인(倭人)이 무시로 왕래하기 때문에 특별히 방호별감(防護別監)을 파견하여 비상시를 대비해야 한다고 하였다.

▲1260년 왜인(倭人)이 제주도에 수시로 왕래하기 때문에 제주부사(濟州副使)는 방호별감(防護別監)을 겸하여 유사시에 대비하고자 하였다.

○《고려사》고려 원종(元宗) 4년(1263) 2월 23일, 왜구(倭寇)가 금주(金州) 관내의 웅신현(熊神縣) 물도(勿島)에 쳐들어와서 여러 주현(州縣)의 공물(貢物) 수송선을 약탈하였다.

▲1263년 지금의 진해 수도(水島)로 침략하여 해안에 정박한 공물 수송선을 약탈한 사건이 발생했다.

○《고려사》고려 원종(元宗) 4년(1263) 4월 5일, 대관서승(大官署丞) 홍저(洪泞)와 첨사부녹사(詹事府錄事) 곽왕부(郭王府) 등을 일본국(日本國)에 파견하여 해적을 금지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첩문(牒文)에서 말하기를, “두 나라가 내왕을 튼 이래 해마다 진봉(進奉) 1회에 선박은 2척을 넘지 않도록 하였으며, 만일 그 밖의 선박이 거짓으로 다른 일을 빙자하여 우리나라의 연해지방 마을을 소란스럽게 할 때에는 엄격하게 처벌하며 금지하기로 약정하였습니다. 그런데 금년 2월 22일에 귀국의 선박 1척이 이유 없이 우리나라의 웅신현(熊神縣) 관내 물도(勿島)에 침입하여 그 섬에 정박하고 있던 우리나라의 공물 수송선에 실린 미곡 120석과 세포(細布) 43필을 약탈하였으며, 또 연도(椽島)에 침입하여 그곳 주민들의 의복과 식량 등 생필품을 모조리 빼앗아갔으므로 이는 원래 약정하였던 내왕의 뜻에 크게 어긋납니다. 지금 홍저 등을 보내어 첩문을 가지고 가게 하니, 공첩(公牒)을 상세히 보고 아울러 사신들의 구두 진술을 듣고서 앞에 언급한 약탈자들을 발본색원하여 징계함으로써 두 나라 사이의 화친의 도리를 굳게 하여 주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1263년 고려 조정에서 일본국(日本國)에 사신을 파견하여 해적을 금지할 것을 요청한 첩지에 미곡 120석과 세포(細布) 43필을 약탈하고, 연도(椽島)에 침입하여 주민들의 의복과 식량 등 생필품을 약탈한 사건에서 그 당시 일본에서 식량과 생필품이 부족한 빈국으로 소명된다.

◉《고려사》<지리> 웅신현(熊神縣)은 본래 신라(新羅)의 웅지현(熊只縣)으로, 경덕왕(景德王) 때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의안군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현종(顯宗) 9년(1018)에 〈김주에〉 내속(來屬)하였다.【고려(高麗)에 와서 성법부곡(省法部曲)을 승격시켜 구산현(龜山縣)으로 삼았고, 금주(金州)의 관할[任內]에 속하게 하였다. 공양왕(恭讓王) 때 칠원(漆原)으로 옮겨 소속되었다.】 가덕도(加德島)가 있다.

▲신라(新羅)의 웅지현(熊只縣)이 변천한 웅신현(熊神縣)으로 《일본서기》에 웅천(熊川)을 개입할 수 없다. 즉, 웅지현(熊只縣)은 신라에서 지정한 지명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고려사》고려 원종(元宗) 4년(1263) 6월 이 달에 일본의 관선대사(官船大使) 여진(如眞) 등이 불법(佛法)을 배우려고 송(宋)으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 승려와 속인(俗人) 도합 230인이 개야소도(開也召島)에 닿았으며, 265인은 군산도(群山島)와 추자도(楸子島)에 도달하였다. 한편 태재부(大宰府) 소경전(少卿殿)의 보통 상선[白商船]에 탔던 78인은 송에서 본국으로 돌아가다가 풍랑을 만나 배를 잃고 작은 배로 선주(宣州) 가차도(加次島)에 표류하여 왔으므로, 전라도안찰사(全羅道按察使)에게 명령하여 양식과 선박을 지급하여 그 나라로 호송하였다.

▲1263년 일본인 승려가 송나라에 불법을 수학하기 위하여 태풍으로 닿은 곳으로 개야소도(開也召島)는 지금의 전북 군산시 옥도면 개야도이며, 군산도(群山島)는 고려와 송나라 무역로의 기항지인 동시에 1380년 최무선(崔茂宣)이 왜구와 전투에서 승리한 금강 하구에 진포해전(鎭浦海戰)의 전적지는 지금의 전라북도 군산시 옥도면 선유도리 고군산군도(古群山群島)가 있다. 추자도(楸子島)는 전라남도 영암군에 속했던 남해안의 섬에 도달하였다. 그리고 선주(宣州)는 지금의 평안북도 선천군에 가차도(加次島)에 표류하여 정박한 군도와 지명을 통하여 일본 축전주(筑前州)에서 송나라 항해는 반드시 한국의 해안을 경유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상선의 해로에서 고대에 상인이 한국을 경유하는 정박지에 국제문화가 혼재할 수밖에 없었다.

○《고려사》고려 원종(元宗) 4년(1263) 7월 27일, 일본의 상선(商船)에 탔던 30인이 풍랑을 만나 구주(龜州) 애도(艾島)에 도착하였으므로, 양식을 주고 호송해 보내라고 명령하였다.

▲1263년 일본 상선이 풍랑으로 구주(龜州) 애도(艾島)에 도착한 곳은 지금의 평북 정주이다.

○《고려사》고려 원종(元宗) 4년(1263) 8월 1일, 홍저(洪泞)와 곽왕부(郭王府) 등이 일본에서 귀국하여 아뢰기를, “해적을 끝까지 추적해보니 바로 대마도(對馬島)의 왜(倭)였습니다. 쌀 20석, 귀밀[馬麥] 30석, 소가죽 70장을 징발해서 가지고 왔습니다.”라고 하였다.

▲1263년 일본에서 해적을 조사한 결과 대마도(對馬島)에 왜적(倭賊)이 고려의 해안을 약탈한 것으로 확인하였다.

○《고려사》고려 원종(元宗) 6년(1265) 7월 1일, 왜구가 남쪽 바닷가의 주군(州郡)을 침략하자, 장군 안홍민(安洪敏) 등에게 명령하여 삼별초(三別抄) 군사를 거느리고 방어하게 하였다.

▲1265년 왜구(倭寇)가 남해안의 주군(州郡)을 침략한 인원은 기록이 없으나 삼별초(三別抄) 군사가 방어한 것으로 보아서 거대한 왜적으로 여겨진다.

○《고려사》고려 원종(元宗) 8년(1267) 1월, 송군비(宋君斐)와 김찬(金贊)이 몽고 사신과 함께 거제도(巨濟島) 송변포(松邊浦)에 도착해서 풍파가 험난한 것을 보고는 두려워서 돌아왔다. 왕이 송군비에게 다시 흑적(黑的, 흑적)을 수행하여 몽고로 보내고, 〈몽고 황제에게〉주(奏)하여 아뢰기를, “조서에서 말씀하신 사신을 인도하여 일본과 우호 관계를 맺는 건에 관해서는, 배신(陪臣) 송군비 등을 보내어 사신을 수행하게 하였습니다. 거제현에 도착해서 멀리 대마도(對馬島)를 바라보다가 큰 바다가 만 리나 되고 풍랑이 하늘까지 닿는 것을 보고는 ‘이렇게 위험한데 어찌 상국(上國)의 사신을 받들고서 위험을 무릅쓰고 함부로 나아가겠는가? 비록 대마도에 도착한다고 해도 저들은 완고하고 사나워서 예의가 없으니 혹시라도 불의의 사고라도 생기면 장차 어찌하겠는가?’ 라 생각하고 함께 돌아왔습니다. 또 일본은 본래 우리나라와 외교관계를 맺지 않았으며 다만 대마도 사람들이 때때로 무역하기 위하여 금주(金州: 경상남도 김해시)를 왕래할 뿐이었습니다. 우리나라는 폐하께서 즉위하신 이후 인자한 덕을 입어서 30년 전쟁 끝에 겨우 숨을 돌릴 수 있게 되어 목숨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성은이 하늘같이 크니 은혜 갚기를 맹세합니다. 만일 할 수 있는 일인데도 몸과 마음을 다하지 않는다면 하늘의 해가 굽어보실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1267년 당시 “일본은 본래 우리나라와 외교관계를 맺지 않았으며 다만 대마도 사람들이 때때로 무역하기 위하여 금주(金州)를 왕래할 뿐이었습니다.”하여 일본과 정식으로 외교가 단절된 상황에서 대마도(對馬島)에 왜구(倭寇)의 본거지로 소명된다.

○《고려사》고려 원종(元宗) 8년(1267) 8월 1일, 흑적(黑的, 흑적), 은홍(殷弘, 은홍)과 송군비(宋君斐) 등이 다시 돌아왔는데, 〈몽고〉황제가 선유(宣諭)하여 이르기를, “지난번에 사신을 파견하여 일본을 회유하려고 경(卿)에게 길안내를 위임하였더니, 경이 이리저리 핑계를 대고 마침내 헛되이 돌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중략> ” 라고 하였다.

▲1267년 당시 원나라 세조(世祖)의 선유(宣諭)에서 “일본은 이미 우호 관계를 맺고 있어 고려의 허실(虛實)을 속속들이 알고 있기 때문에 다른 말로 핑계 댔을 것이다.”하여 원나라와 일본은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 고려의 내정에 관하여 일본 사람은 정세를 분석한 것으로 보았다. 원나라가 일본을 회유하려는 목적은 남송(南宋, 1127-1279)과 일본의 관계를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고려 원종(元宗) 8년(1267) 8월 22일, 기거사인(起居舍人) 반부(潘阜)를 파견하여 몽고의 국서(國書)와 우리나라의 국서를 가지고 일본으로 가게 하였다. 몽고의 국서에서 말하기를, “대몽고의 황제는 일본국왕에게 글을 보냅니다. 짐이 생각하건대, 예로부터 작은 나라의 군주는 영토가 맞붙어 있으면 신의와 우호를 유지하려고 노력해왔습니다. 하물며 우리 선조는 하늘의 밝은 명령을 받아서 중화의 땅을 차지하게 되었으므로, 머나먼 곳에서도 우리의 위엄을 두려워하고 인덕을 흠모하여 귀순하는 나라가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짐이 즉위한 초기에 고려의 무고한 백성이 오랜 전란에 신음하고 있었으므로, 즉시 군대를 철수하고 영토를 돌려주었으며 포로도 돌려보냈습니다. 고려의 임금과 신하가 모두 감격하여 내조(來朝)하여, 〈몽고와 고려는〉의리로는 군신(君臣)이지만 정(情)으로는 부자지간과 같습니다. 아마도 일본의 군신들도 이미 알 것입니다. 고려는 짐의 동쪽 번국(藩國)으로 일본과는 매우 가깝습니다. 〈일본도〉개국한 이래 때때로 중국과 왕래하였다고 하지만, 짐의 통치 시기에는 한 번도 사신을 파견하여 우호관계를 맺은 적이 없습니다. <중략> 귀국이 중국과 우호관계를 맺은 것은 어느 때에도 없던 적이 없습니다. 하물며 지금 황제가 귀국과 우호하려는 것은 귀국의 공물을 이롭게 여겨서가 아니라, 아마도 황제의 덕화를 입지 않는 곳이 없다는 명성을 천하에 떨치려고 함인 듯합니다. 만약 귀국이 우호관계를 맺는다면 반드시 특별히 우대할 것이니, 한번 사신을 파견하여 살펴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귀국은 잘 생각하십시오.”라고 하였다.

▲1267년 당시 원나라 세조(世祖)가 일본국왕에게 보낸 국서에서 “고려는 짐의 동쪽 번국(藩國)으로 일본과는 매우 가깝습니다.”하여 고려는 원나라의 번국(藩國)으로 사대하였으며, 일본에 대하여 “짐의 통치 시기에는 한 번도 사신을 파견하여 우호관계를 맺은 적이 없습니다.”하여 원나라 제5대 세조(재위 1260-1271)가 즉위하면서 외교 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일본을 회유하였다.

○《고려사》고려 원종(元宗) 8년(1267) 11월 11일, 몽고에 왕의 동생 안경공(安慶公) 왕창(王淐)을 하정사(賀正使)로 보내고, 반부(潘阜)를 다시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하였다고 보고하였다.

▲1267년 고려의 무신 반부(潘阜, 1230-?)가 몽고와 일본이 통상화친을 위하여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하였다.

○《고려사》고려 원종(元宗) 9년(1268) 12월 4일,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신사전(申思佺)과 시랑(侍郞) 진자후(陳子厚), 기거사인(起居舍人) 반부(潘阜)를 흑적(黑的, 흑적)ㆍ은홍(殷弘, 은홍)과 함께 일본으로 보냈다.

▲1268년 반부(潘阜)와 원나라 병부시랑 흑적(黑的) 등을 다시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한 것은 외교가 원만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고려 원종(元宗) 10년(1269) 3월 16일, 흑적(黑的, 흑적)과 신사전(申思佺) 등이 대마도에 도착하여 왜인(倭人) 2인을 잡아서 돌아왔다.

▲1269년 원나라 병부시랑 흑적(黑的)과 고려의 병부상서 신사전(申思佺)이 대마도에서 왜인을 잡아 온 것은 일본에서 원나라와 외교를 원하지 않은 것을 반증한다.

○《고려사》고려 원종(元宗) 10년(1269) 5월 15일, 경상도안찰사(慶尙道按察使)가 급보하기를, “제주(濟州) 사람이 표류하여 일본에 갔다가 돌아와서 말하기를, ‘일본이 병선(兵船)을 준비하여 장차 우리나라를 침범하려고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삼별초(三別抄)와 대각반(大角班)을 파견하여 해변을 순찰하게 하였다. 또 연해의 군현(郡縣)에게 성을 쌓고 양식을 비축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며, 창선현(彰善縣: 경상남도 남해군 창선)에 보관하던 국사(國史)를 진도(珍島)로 옮겼다.

▲1269년 “일본이 병선(兵船)을 준비하여 장차 우리나라를 침범하려고 합니다.”라는 급보에서 대응하기 위하여 창선현(彰善縣)에 보관했었던 국사(國史)를 진도(珍島)에 옮긴 국사(國史)는 현재 전승하지 않기 때문에 어느 시대 역사서인지 알 수 없으나 남해안에 보관한 것은 북방민족의 침략에 대비하여 가장 후방으로 남해안 사고에 소장했는데, 다시 일본이 침략으로 전운이 감돌면서 다시 진도로 옮긴 국사(國史)는 단군조선과 고구려의 정통성을 계승한 역사가 총괄한 것으로 추정한다.

○《고려사》고려 원종(元宗) 10년(1269) 7월 20일, 몽고 사신 우루대(于婁大, 우루다이)와 우정(于琔) 등 6인이 왜인과 함께 오자, 왕창(王淐)이 교외에 나가서 영접하였다. 처음에 신사전(申思佺)이 왜인과 함께 몽고 황제를 알현하자, 황제가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 “너희 국왕이 나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여 너희를 일본으로 가게 하였다. 너희가 길이 험하다는 핑계를 대지 않고 위험한 땅으로 들어갔다가 살아 돌아와서 복명(復命)하니 그 충절이 가상하다.”라고 하면서 비단필을 후하게 하사하고 수행한 군졸들까지도 주었다. 또 왜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 나라가 중국에 조빙한 지는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 지금 내가 너희 나라에게 입조(入朝)하라는 것은 너희를 핍박하려는 게 아니라 단지 후세에 이름을 남기고자 함이다.”라고 하며, 왜인들에게도 선물을 후하게 주고 궁전을 구경하게 해주었다. 구경을 마치자 왜인이 아뢰기를, “신들은 천당과 극락이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바로 여기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라고 하였고, 황제가 기뻐서 또 연경(燕京) 만수산(萬壽山)의 옥전(玉殿)과 여러 궁궐을 두루 구경하게 하였다.

▲1269년 고려 왕창(王淐)은 임연(林衍) 등이 원종(元宗)을 폐위하면서 임시 국왕인 영종(英宗)[1269.6.21.-1269.11]으로 재위하기 전에 원나라 사신으로 입조하였다. 영종(英宗)은 원나라의 압력으로 폐위당하면서 영종의 재위도 원종(元宗)에 포괄시키고 있어 혼돈의 역사에서 군사력을 증강하는 일본과 대치하는 국면으로 일본의 외교는 절실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고려 원종(元宗) 11년(1270) 12월 20일, 또 하나의 조서(詔書)에서 말하기를, “ <생략> 작년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고려가 남송(南宋)ㆍ일본(日本)과 통하고 있다고 하기에, 일찍이 경에게 물었더니 경은 소인의 말에 현혹되어서 그런 일이 없다고 대답하였다. 금년에 남송에서 상선(商船)이 왔을 때 경은 우리 몰래 돌려보냈는데, 행성(行省)이 힐문하자 그제서야 비로소 말하기를, ‘행성이 알지 못하게 하려고 하였는데, 이것은 잘못입니다.’라고 하였다. 또 장차 일본국에 귀부(歸附)할 고려인이 있었는데, 그가 말하기를, ‘전에는 일본이 해마다 고려에 조공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1270년 당시 원나라는 고려가 남송(南宋)과 일본(日本)과 통하는 것도 내정간섭이 이어졌으며, “전에는 일본이 해마다 고려에 조공하였습니다.”하여 고려 초대 태조 왕건(재위 918-943)으로부터 1270년 이전에는 일본은 고려 조정에 조공한 것은 약소국이 명백하다. 따라서 고려가 건국하기 이전에 통일신라와 삼국시대로 소급할 때 왜국은 빈국으로 한반도에 삼국의 문물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런데 1270년경을 기준으로 이후에는 일본의 군사력이 증강되면서 문화도 발전하면서 내륙지역에 고려와 대등한 외교가 성립하기 시작한 단초를 보인다.

○《고려사》고려 원종(元宗) 12년(1271) 1월 12일, 또 보고하기를, “조서(詔書)에서 말한 남송(南宋)의 배를 떠나보낸 것에 관한 것입니다. 얼마 전 질문을 받았을 때에 대답하기를 ‘예전에는 송(宋)의 상선(商船)이 왕래하였으나 최근 10년간은 온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마침 몇 해 전에 배 1척이 우리나라 경내에 도착하였는데, 우리나라의 담당 관리가 폐하께서 이전부터 계속 왕래하였으나 그 사실을 숨기고 말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할까 염려하여 그 배를 송환하기로 의논하였습니다. <생략>.”라고 하였다.

▲1270년 중원에서는 원나라와 남송(南宋)이 대치한 국면에서 고려에서 송(宋)나라와 상선(商船)이 왕래를 억압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며, 일본(日本)이 세공(歲貢)을 바치는 것은 중원에서 원나라의 군사력이 막강한 것을 인지했기 때문이다.

○《고려사》고려 원종(元宗) 12년(1271) 1월 15일, 몽고(蒙古)가 일본국신사(日本國信使)인 비서감(秘書監) 조양필(趙良弼)과 홀림적(忽林赤, 쿠린치), 왕국창(王國昌), 홍차구(洪茶丘) 등 40인을 보냈다. 조서(詔書)에서 말하기를, “내가 생각하건대 일본은 예로부터 중국과 교류하였으며, 또한 그대의 나라와 지역이 서로 가깝기 때문에 진작 그대에게 조서를 보내서 가는 사신을 인도하여 일본에 도착하도록 하고 우호관계를 맺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 나라의 국경을 지키는 관리들이 저지하는 바람에 나의 뜻을 분명하게 전달하지 못하였으며, 그 뒤에는 임연(林衍)의 일 때문에 겨를이 없었다. 이제는 그대 나라가 안정을 되찾았으므로 다시 조양필을 국신사로 삼아 파견하니, 반드시 일본에 도착할 수 있도록 하라. 또한 홀림적과 왕국창, 홍차구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해안까지 호송하게 하고, 국신사가 돌아올 때까지 임시로 금주(金州) 등지에 주둔하도록 하였다. 주둔하는 동안 소요되는 군량은 그대가 전담 관리를 그곳에 파견하여 가까운 곳에서 공급하도록 하며, 전함을 금주에 집결 대기시켜서 출발이 지체되거나 물자가 부족한지 않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1271년 원나라에서 일본국신사(日本國信使)를 대단위 사신을 파견한 목적은 우호관계를 맺기 위한 것으로 사신의 행로에서 군사가 호송하고 일본에서 사신이 돌아올 때 까지 금주(金州) 등지에 주둔하게 하여 고려와 원나라에 반정세력이 팽배한 것을 반증한다. 이 당시 고려 원종(元宗)이 교외에서 조서를 맞이한 것은 고려의 왕조의 사직을 보존하기 위한 궁여지책으로 보인다.

○《고려사》고려 원종(元宗) 12년(1271) 3월, 몽고(蒙古)에서 흔도(忻都, 힌두)와 사추(史樞) 등을 파견하여 아해(阿海, 아카이)를 대신하게 하고, 조서(詔書)에서 말하기를, “짐이 일찍이 사신을 파견하여 일본(日本)에게 통교하자고 설득하였으나, 〈일본이〉어리석게 고집을 부리며 문을 굳게 닫는 바람에 좋은 말로 설득하기는 어렵게 되었음은 경도 아는 바이다. 이제 저들을 경략(經略)하려면 유사(有司)에 명령하여 군대를 보내 둔전(屯田)을 경작하고 저들을 공격하여 취할 계획을 세웠으니, 이로써 그대 나라는 장차 군수물자를 조달하는 고통을 면할 것이다. 이에 다시 조서를 휴대한 사신을 파견하여 먼저 회유하는 뜻을 보이려고 하니, 경은 오로지 한 마음으로 이 방략(方略)을 도와 일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함으로써 나의 뜻에 부합하시오.”라고 하였다. 또 중서성(中書省)에서 문서를 보내 말하기를, “황제의 뜻을 받들어 흔도와 사추를 행경략사(行經略司)로 임명하여 봉주(鳳州) 등지에 둔전 군영을 설치합니다. 둔전에 필요한 소 6,000두 중에서 동경(東京) 등지에서 보낼 반(半)을 제외한 나머지 3,000두는 경략사(經略司)로 하여금 돈을 수령하여 고려(高麗) 현지에서 구매하라고 하였습니다. 그 외의 농기구와 종자, 사료 등과 가을까지 필요한 군량은 고려가 일체 공급하고 결핍되지 않도록 하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1271년 원나라에서 일본(日本)과 통교를 원하였으나 원만하지 않자 경략(經略)에 관하여 군대를 보내 둔전(屯田)을 경작하면서 군수물자를 고려에서 조달하여 전쟁준비에 착수하게 되었다.

○《고려사》고려 원종(元宗) 12년(1271) 3월, 이 달에 전중감(殿中監) 곽여필(郭汝弼)을 몽고(蒙古)에 파견하였는데, 진정표(陳情表)의 대략적인 내용에서 이르기를, “천자(天子)의 사신 흔도(忻都, 힌두)와 사추(史樞)가 도착하여 황제께서 말씀하신 일본 정벌에 관한 일을 전하였습니다. 우리나라는 방금 강화도 섬에서 육지로 나와 온 마음을 다하여 직책을 수행하려고 하는데도, 저희가 일본과 가까이 지내면서 그들을 비호한다고 하시니 어찌 그러한 일이 있겠습니까? 다만 그 풍속이 완고하고 어리석기 그지없어 상국(上國)의 사신이 그 땅에 들어갔을 때 접대함에 근실하지 못한 일이 있을까 걱정일 뿐입니다. 이제 다시 황제의 명령이 엄하게 내려오니 황공하여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사신의 지휘를 공경히 받들어 기필코 일을 이루어 내겠습니다. 또 중서성(中書省)에서 첩문(牒文)을 받았는데, 봉주(鳳州)의 둔전(屯田)에 필요한 농우(農牛)ㆍ농기구ㆍ종자ㆍ군량 등에 관한 일이었습니다. 농우에 관해서는 지난 번 표문에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나라 서울에서는 기르는 사람이 드물고 지방에서는 농민이 비록 기르고 있다 해도 넉넉한 자는 한두 마리에 불과하고 가난한 자는 대부분 쟁기로 밭을 갈거나 혹은 서로 소를 빌려서 부리고 있습니다. 지금 지방에서 기르는 소는 모두 전라도(全羅道)의 군량 수송으로 배를 곯고 피로해서 없어진 것이 태반입니다. 농기구는 우리나라 백성이 원래 넉넉하게 가지고 있지는 않아서 요구한 수만큼 마련하지는 못하지만 힘닿는 대로 마련해 조달할 예정입니다. 종자의 경우, 백성들이 해마다 농사를 지어 공물(貢物)과 부세(賦稅)로 납부하고 그 나머지로 양식을 삼으며, 약간의 곡식을 남겨 다음 해의 농사 종자로 비축합니다. 그러므로 비록 집집마다 거둔다고 해도 거의 많은 양이 되지는 못할 것입니다. 군량의 경우, 큰 병란 이후 우리나라에 비축해 둔 것을 역적들이 거의 약탈한 것을 제외하면, 전부 여기에 주둔하는 귀국의 군인과 말 및 역적 토벌군의 군인과 말에 공급하느라 다 사용하여서 남는 것이 없습니다. 나라 안팎의 신민(臣民)들로부터 벌써 여러 차례 거두어 들였기 때문에 연달아 다시 거둘 수가 없는 형편입니다. 게다가 종자ㆍ사료 및 가을까지 조달할 군량을 계산해 보면 모두 몇 만 석이나 되는데, 이것을 도대체 어디서 구할 수 있겠습니까? 설상가상으로 지금 역적이 날로 기승을 부려 경상도(慶尙道) 김주(金州)와 밀성(密城)까지 쳐들어왔는데, 거기에 더하여 남해(南海)ㆍ창선(彰善)ㆍ거제(巨濟)ㆍ합포(合浦)ㆍ진도(珍島) 등지를 약탈하고 심지어 연해의 부락까지 모조리 약탈하였기 때문에 백성에게서 거두어 〈수요량에〉대기가 어렵습니다. 경상도와 전라도의 공부(貢賦)는 모두 육로로 수송하지 못하고 반드시 수운(水運)으로 해야 하는데, 지금 역적이 진도(珍島)에 웅거하고 있고 여기는 바로 수로(水路) 교통의 목에 해당하여 왕래하는 배가 지나갈 수가 없으니 군량과 소 먹이, 농사의 종자를 아무리 거둔다고 해도 수송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감히 명령을 어길 수 없어서 마땅히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 기약하며, 다만 이른바 농기구ㆍ농우ㆍ종자ㆍ식량이란 것은 모두 백성들이 먹고 사는 것이어서 이것을 다 빼앗아 군대에 공급하면 여기 삼한(三韓)의 남은 백성은 거듭 기아 상태에 빠져 소멸하고 말 것입니다. 우매한 저는 이 점을 민망히 여기고 있으니, 폐하께서 밝게 살펴주시기만 간곡히 바라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1271년 원나라는 일본의 경략(經略)에 군수물자의 조달로 고려에서는 농우는 지방에서 사육하는 소는 모두 전라도(全羅道)의 군량 수송으로 배를 곯고 피로하여 없어진 것이 태반이고, 농기구는 넉넉하게 가지고 있지 않으며, 종자는 공물(貢物)과 부세(賦稅)로 납부하고 다음 해의 농사 종자로 비축한 양이 적으며, 군량은 역적들이 거의 약탈하여 남는 것이 없었다. 더구나 역적이 경상도(慶尙道) 김주(金州)와 밀성(密城), 남해(南海)ㆍ창선(彰善)ㆍ거제(巨濟)ㆍ합포(合浦)ㆍ진도(珍島) 등지와 연해를 약탈하여 수요량 대기가 어려움을 하소연하고 있다.

○《고려사》고려 원종(元宗) 13년(1272) 1월 18일, 조양필(趙良弼)이 일본(日本)에서 돌아왔는데, 서장관(書狀官) 장탁(張鐸)을 파견하여 일본 사신 12인을 데리고 원(元)으로 가게 하였다. 왕이 통역관[譯語] 낭장(郎將) 백거(白琚)를 보내며 하례하는 표문(表文)에서 말하기를, “황제의 덕화가 널리 퍼져 멀리 해 뜨는 나라에까지 미치니, 이역(異域)에서도 모두 복종하여 다 함께 황제의 은혜를 기뻐합니다. 저 왜인(倭人)은 동해 바다에 있는데 선무사(宣撫使) 조양필이 작년 9월에 금주(金州)에 도착하여 배를 마련하여 바다를 건너갔습니다. 올해 정월 13일에 일본 사절 12인과 함께 합포현(合浦縣) 경계에 돌아왔으니 이는 진실로 황제의 은덕에 말미암은 것입니다. 저들이 황제의 풍모를 바라보고 귀순하기를 사모하여 하루아침에 바다를 건너 처음으로 그들의 직분을 지키려고 왔으니, 10,000리 밖에서도 황제를 우러르는 저의 기쁨을 어찌 형언할 수 있겠습니까? 이에 급히 사신을 보내 황제에게 하례의 말씀을 드립니다.”라고 하였다.

▲1272년 일본 사신 12인이 합포현(合浦縣)에 이르러 원나라 귀순한 것은 중원의 패자(覇者)로 군림한 것을 보여준다.

○《고려사》고려 원종(元宗) 13년(1272) 2월 10일, 세자 왕심(王諶)이 원(元)에서 돌아왔는데, 원(元) 황제가 단사관(斷事官) 불화(不花, 부카)와 마강(馬絳)을 함께 딸려 보냈다. 중서성(中書省)이 보낸 첩문(牒文)에서 말하기를, “세자 왕심이 말한 바에 의하면, ‘우리 부자(父子)가 서로 연이어 원 조정에서 황제를 만나고 특별한 은혜를 받아서, 우리나라 백성이 남은 목숨을 보전하게 되었고 감사하는 마음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제가 매년 입조(入朝)하여 만날 때마다 항상 황은(皇恩)을 입었으니 충심으로 보답하려는 마음이 더욱 간절합니다. 저 일본(日本)은 성스러운 덕화(德化)를 입지 못하였으므로, 조서(詔書)를 휴대한 사신을 보내고 계속 군대의 위용을 떨쳐야 하기에 모름지기 전함과 군량이 있어야 합니다. 그 일을 저에게 맡긴다면 마음과 힘을 다하여 미력이나마 황제의 군대[王師]를 돕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도성(都省)에서 상주하고 성지(聖旨)를 받들었는데, ‘세자로 하여금 친히 가게 하고, 상서성(尙書省) 마 낭중(馬 郞中)으로 하여금 함께 가게 하라.’라고 하시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때 세자가 오랫동안 연경(燕京)에 머물고 있어서 수행한 자들이 모두 고국에 돌아오고 싶은 마음에, 일본 정벌[東征]을 구실로 삼아 황제에게 청하여 돌아가자고 세자에게 권하였다. 설인검(薛仁儉)과 김서(金㥠) 등이 불가하다고 하면서 말하기를, “세자께서 여기에 계시는 것은 사직을 보위하기 위해서인데, 이제 이런 일로 귀국을 요청한다면 본국은 어떻게 되겠습니까?”라고 하므로 세자가 그만두었다. 그런데 마침 임유간(林惟幹)이 이 소식을 듣고 이 일을 핑계로 먼저 귀국하여 몰수당한 토지와 노비[田民], 재물을 되찾으려고 하자, 세자가 그 흉계를 알고 부득이 황제에게 요청한 것이다. 나라 사람들은 세자의 변발(辮髮)과 오랑캐 옷차림[胡服]을 보고 모두 탄식하였으며 심지어 우는 자도 있었다.

▲1272년 세자 왕심(王諶)은 원종의 장자로 대원제국 쿠빌라이카안(忽必烈汗, 재위 1271-1294)의 딸인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와 혼인하여 부마국이 되었다. 세자가 환국할 때 오랑캐 나라로 여기던 복식과 변발을 수용하면서 백성이 탄식하면서 정체성을 상실하는 것을 보여준다. 그는 고려 25대 충렬왕(忠烈王)[재위 1274-1298, 복위 1298-1308]은 원나라의 내정간섭을 받게 되었다.

○《고려사》고려 원종(元宗) 13년(1272) 4월 3일, 일본(日本) 사신이 원(元)에서 돌아왔는데, 장탁(張鐸)이 동행하여 와서 황제의 명령을 발표하기를, “통역관[譯語] 별장(別將) 서칭(徐偁)과 교위(校尉) 김저(金貯)는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공을 세웠으니 마땅히 큰 관직을 주어야 한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서칭을 장군(將軍)으로, 김저를 낭장(郎將)으로 임명하였다.

▲대원제국 쿠빌라이카안은 1279년 남송을 정복하고 고려를 부마국으로 삼으면서 고려의 역사는 원나라에 복속을 면했지만, 원나라의 내정간섭은 모면할 수 없었기 때문에 황제의 명령으로 임명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고려 원종(元宗) 13년(1272) 4월 7일, 어사(御史) 강지소(康之邵)를 파견하여 일본(日本) 사신을 호송하여 그 나라로 돌아가게 하였다.

▲1272년 일본(日本) 사신의 안전한 신변보호를 위하여 호송한 것은 원나라 침략에 대항세력이 잔존한 것을 반증한다.

○《고려사》고려 원종(元宗) 13년(1272) 7월 8일, 왜선(倭船)이 금주(金州)에 도착하자 경상도안무사(慶尙道按撫使) 조자일(曹子一)이 일본(日本)과 교통한 일이 발각되어 원(元)으로부터 문책을 당할까 두려워하여 몰래 그 나라로 돌려보냈다. 그런데 홍차구(洪茶丘)가 이 소식을 듣고 조자일을 국문하고 원 황제에게 급히 보고하였다.

▲1272년 원나라의 내정간섭으로 왜선(倭船)이 금주(金州)에 도착하였어도 복귀시키면서 외교권의 주권이 상실된 것을 보여준다.

○《고려사》고려 원종(元宗) 13년(1272) 12월 26일, 원(元)이 다시 조양필(趙良弼)을 파견하여 일본(日本)으로 가서 귀부(歸附)할 것을 설득하게 하였다.

▲1272년 원(元)나라에서 조양필(趙良弼)을 일본(日本)에 파견하여 귀부(歸附)를 설득하려는 것은 일본이 쇄국정책의 단면을 보인다.

○《고려사》고려 원종(元宗) 14년(1273) 3월 20일, 조양필(趙良弼)이 일본(日本)에 가서 대재부(大宰府)에 도착하였지만, 그 나라 수도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왔다.

▲1273년 조양필(趙良弼)이 일본(日本) 대재부(大宰府)에 도착했으나 도읍지에 들어가지도 못한 것은 전쟁을 불사하려는 의지를 보인다.

○《고려사》고려 원종(元宗) 15년(1274) 1월, 원(元)이 총관(摠管) 찰홀(察忽, 차쿠)을 보내 전함(戰艦) 300척의 건조를 감독하게 하고, 거기에 필요한 공장(工匠)과 일꾼 및 일체의 물자를 완전히 고려(高麗)가 부담하도록 위임하였다. 이에 문하시중(門下侍中) 김방경(金方慶)을 동남도도독사(東南道都督使)로 임명하였다.

▲1274년 원(元)나라가 일본을 정벌하기 위하여 군수물자는 일체 고려(高麗)가 전담을 강요한 것은 전쟁의 도구로 삼은 약소국의 비운을 보인다.

○《고려사》고려 원종(元宗) 15년(1274) 3월 9일, 원(元)이 경략사(經略司) 왕총관(王摠管)을 보내 군사 5,000명을 동원하여 일본(日本) 정벌을 도우라고 하였는데, 당시 전주도(全州道)와 나주도(羅州道)에서 전함(戰艦)을 만드는 일꾼 30,500여 명과 홍차구(洪茶丘)가 거느리는 공사 감독군[監造軍]에 대한 식량 공급이 부족하여 동경(東京)과 진주도(晋州道) 지역의 계유년(癸酉年, 1273)분의 녹봉을 운반하여 주었다. 왕은 요역이 번거롭고 군량을 운반할 때의 폐단으로 농사일을 그르칠까 우려하여 상장군(上將軍) 이분희(李汾禧)를 홍차구에게 보내 전체 인원의 절반씩을 귀농시키자고 설득하자, 홍차구가 그 제안을 수긍하고 배 1척당 쌍정(雙丁) 50인을 머물게 하고 그 나머지 단정(單丁)은 모두 귀농시켰다.

▲1274년 원(元)나라가 군사 5,000명을 동원하여 일본(日本)을 정벌하기 전에 전함(戰艦)을 제작하는 30,500여 명의 식량이 부족하여 1년간 녹봉까지 운반하였다.

○《고려사》고려 원종(元宗) 15년(1274) 5월 14일, 원(元)의 일본(日本) 원정군 15,000인이 왔다.

▲1274년 원(元)나라에서 일본(日本) 원정군 15,000인이 도착하여 고려의 백성은 궁핍한 생활이 가중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고려 원종(元宗) 15년(1274) 5월 21일,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송송례(宋松禮)와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기온(奇蘊), 응양군상장군(鷹揚軍上將軍) 김광원(金光遠)에게 명하여 일본(日本) 정벌군을 더 뽑으라고 하였다.

▲1274년 일본(日本) 정벌군을 증원에서 강제성을 보인다.

○《고려사》고려 원종(元宗) 15년(1274) 7월 12일, 김방경(金方慶)이 일본을 정벌하는[征東] 선봉별초(先鋒別抄)를 거느리고 원정길에 올랐다.

▲1274년 김방경(金方慶, 1212-1300)은 선봉별초(先鋒別抄)로 일본의 원정에 선발대로 진군하면서 굴욕적인 생사의 기로에서 만감이 교차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고려 원종(元宗) 15년(1274) 8월 6일, 원(元)에서 일본정토도원수(日本征討都元帥) 홀돈(忽敦, 쿠둔)을 보내어 와서 경군(京軍) 458인을 추가로 동원하라고 하였다.

▲1274년 원(元)나라에서 일본(日本) 토벌에 동원된 군사는 경군(京軍)에서도 차출하여 동원령에서 반드시 일본을 복속하려는 의지가 확고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고려 충열왕(忠烈王) 원년(1274) 10월 3일, 도독사(都督使) 김방경(金方慶)은 중군(中軍)을 거느리게 하고, 박지량(朴之亮)ㆍ김흔(金忻)을 지병마사(知兵馬事)로, 임개(任愷)를 부사(副使)로 삼았고, 김신(金侁)을 좌군사(左軍事)로 삼고, 위득유(韋得儒)를 지병마사(知兵馬事)로, 손세정(孫世貞)을 부사(副使)로 삼았으며, 김문비(金文庇)를 우군사(右軍使)로 삼고, 나유(羅裕)와 박보(朴保)를 지병마사(知兵馬事)로, 반부(潘阜)를 부사(副使)로 삼아 삼익군(三翼軍)이라 불렀다. 원(元)의 도원수(都元帥) 홀돈(忽敦, 쿠둔)과 우부원수(右副元帥) 홍차구(洪茶丘), 좌부원수(左副元帥) 유복형(劉復亨)과 더불어 몽한군(蒙漢軍) 25,000명, 아군(我軍) 8,000명, 초공(梢工)ㆍ인해(引海)ㆍ수수(水手) 6,700명, 전함(戰艦) 900여 척을 거느리고 일본을 정벌하게 하였다. 일기도(一岐島)에 이르러 1,000여 명을 쳐 죽이고 길을 나누어 진격하였다. 왜인(倭人)들이 달아나는데 쓰러진 시체가 마치 삼대 같았다. 날이 저물어 이내 공격을 늦추었는데 마침 밤에 폭풍우가 크게 불어서 전함들이 바위와 벼랑에 부딪쳐 많이 부서지고 김신(金侁)은 익사하였다.

▲1274년 음력 10월 3일은 양력으로 11월 초에 계절풍에 의하여 정예군의 전함이 파괴되면서 일본 정벌은 실패하였다. 이 날은 공교롭게도 《일본서기》에 신공황후가 섭정전기 200년에 10월 3일에 삼한정벌로 번국을 설치한 것으로 기록하였는데, 바닷바람에 신라정벌은 요원한 풍신(風神)의 가피력은 허구성으로 분석한다.

○《고려사》고려 충열왕(忠烈王) 원년(1274) 11월 27일, 동정(東征) 갔던 군사들이 합포(合浦)로 돌아왔다.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장일(張鎰)을 파견하여 위로하였는데, 돌아오지 못한 군사가 무려 13,500여 인이었다.

▲1274년 일본 정벌에서 계절풍으로 인하여 13,500여 명이 익사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고려 충열왕(忠烈王) 원년(1275) 1월 8일, 시중(侍中) 김방경(金方慶)과 대장군(大將軍) 인공수(印公秀)를 원(元)에 파견하여 표문(表文)을 올렸다. 표문에서 말하기를, “소방은 근래 역적을 소탕하고 〈상국(上國)의〉대군(大軍)에 군량을 공급하는 일로 이미 해마다 민호(民戶)에게서 양식을 거두어들였습니다. 게다가 일본[倭民]을 정벌하는데 필요한 전함(戰艦)을 건조하는 데 장정(壯丁)들이 모두 공역(工役)에 징발되었고 노약자들만 겨우 밭 갈고 씨 뿌리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가물다가 나중에는 홍수가 져서 곡식이 잘 여물지 못하였습니다. 결국 군량과 국가에서 필요한 수요를 빈민들로부터 거두었는데 한 말, 한 되까지 다 기울여서 바쳐버렸으므로 벌써부터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백성들의 피폐함이 지금보다 심했던 적이 없었습니다. 더욱이 전장에서 부상당하고 물에 빠져서 돌아오지 못한 군사들이 많아서 비록 남은 백성들이 있지만 어느 세월에 소생할지 기약할 수 없습니다. 만약 다시 일본 정벌을 일으킨다면 그에 필요한 전함과 군량은 실로 우리나라로서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나라가 피폐하여 부지할 수 없게 되었으니 어찌할 수 없는 일입니다. 황제께서 직접 보지 못하셨으니 당연히 어찌 그 지경까지 이르렀겠냐고 하시겠지만, 엎드려 바라건대 지극한 정성을 받아주시고 간절한 호소를 굽어 살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1275년 김방경(金方慶)은 대군(大軍)에 군량미는 민호(民戶)에서 거두고, 전함(戰艦)의 건조는 장정(壯丁)을 공역(工役)에 징발하고, 노약자가 농사하면서 수확이 부진하여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자가 증가하고, 전쟁에서 부상자의 속출로 인하여 다시 일본 정벌은 불가한 것으로 호소하였다.

○《고려사》고려 충열왕(忠烈王) 원년(1275) 3월 10일, 원(元)에서 선유일본사(宣諭日本使)인 예부시랑(禮部侍郞) 은세충(殷世忠)과 병부낭중(兵部郞中) 하문저(河文著)를 보내왔다.

▲1275년 원(元)나라에서 보내 온 선유일본사(宣諭日本使)는 일본의 정세를 정탐하기 위하여 파견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고려 충열왕(忠烈王) 원년(1275) 9월 21일, 원(元)에서 사신(使臣)을 파견하였는데 검공(劍工) 고내(古內)가 같이 왔다. 고내가 원에 있으면서, “고려(高麗)에는 일본(日本)으로 가는 지름길이 있습니다.”라고 했기 때문에 보낸 것이다.

▲1275년 원(元)나라 사신이 고려(高麗)를 경유하여 일본(日本)으로 가는 지름길은 남해안에 김해에서 대마도의 해로를 말한다.

○《고려사》고려 충열왕(忠烈王) 원년(1275) 10월 25일, 원(元)이 다시 일본(日本)을 정벌하려고 하기 때문에 김광원(金光遠)을 파견하여 경상도도지휘사(慶尙道都指揮使)로 삼아서 전함(戰艦)을 수리하고 건조하게 하였다.

▲1275년 원(元)나라 세조 쿠빌라이칸의 조부인 칭기스칸은 몽골제국(재위 1206-1227)을 건설하여 한반도, 중앙아시아, 동유럽의 영토를 정복한 제국의 위용은 간과할 수 없는 쿠빌라이칸은 중원의 패자(覇者)로 희생을 감내하면서 일본을 정복하겠다는 의지가 굳건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고려 충열왕(忠烈王) 2년(1276) 10월 29일, 통역관을 원(元)에 파견하여 일본 밤[栗]을 바쳤다. 처음에 조양필(趙良弼)이 일본 밤을 얻어서 의안현(義安縣)에 심었는데 이제야 열매를 맺었다.

▲1276년 일본 밤을 얻어서 의안현(義安縣)에 심은 것을 수확하여 원(元)나라 바친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고려 충열왕(忠烈王) 3년(1277) 2월 8일, 장순룡(張舜龍)을 원(元)에 파견하여 중서성(中書省)에 상서(上書)하기를, “이번에 중서성의 첩문(牒文)을 받았는바, 첩문에서는 ‘추밀원(樞密院)에서 말하기를, 「상주하고 성지(聖旨)를 받들었는데, 『홍차구(洪茶丘)로 하여금 고려(高麗)로 가서 흔도(忻都, 힌두)와 함께 관할하게 하라. 것은 일본(日本)을 정벌하러 갔다가 집으로 돌아온 3,000의 군사 역시 가도록 하라.』라는 것이었습니다. 추밀원[本院]에서 살피건대, 참군(站軍) 200명과 환가둔전군(還家屯田軍) 3,000명 및 활단적(闊端赤, 쿠데치)은 이전에 일본 정벌 때의 규칙[數目]에 따라 군량미와 말 사료[草料]를 공급해야 하겠습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받고 살피건대 소방(小邦)은 지원(至元) 7년(1270) 이후 진도(珍島)와 탐라(耽羅), 일본을 정벌할 때마다 대군(大軍)의 군량을 모두 백성들에게 부과 징수하였습니다. 그 이후에는 현재 합포진변군(合浦鎭邊軍), 탐라방호군(耽羅防護軍), 염주(塩州)ㆍ배주(白州)의 귀부군(歸附軍) 및 활단적에게 1년간의 군량 18,629석(石) 2두(斗), 말과 소의 사료 32,952석 6두를 모두 중국 되[漢斗]로 계산한 것인데, 이 역시 백성들에게서 거두었습니다. 이번에 파견한 둔전군 3,200명 및 활단적 등의 군량과 사료는 어디에서 다시 거두어들이겠습니까? 일찍이 지원 7년에 성지(聖旨)를 받들어 둔전군 2,000인의 농우(農牛)ㆍ농기구ㆍ식량ㆍ종자를 공급하였는데, 이제 여러 해가 지났으니 반드시 저장된 것이 있을 것입니다. 청하건대 경략사(經略司)에서 거둬들인 곡식을 지급하도록 해주십시오. 또 마낭중(馬郞中)이 저축한 군량은 여러 해 묵었으니 식용으로 적당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살피건대 지원 11년(1274) 중서성의 첩문에서, ‘염주ㆍ합포 군인과 말의 식량과 사료는 마낭중이 저축한 군량 중에서 보충하여 지급하라.’라고 하였습니다. 이번에도 군인과 말의 식량과 사료를 역시 이 군량미로 지급하면 우리나라의 불쌍한 백성들이 거듭 곤란에 빠지지 않게 될 것입니다. 또 첩문을 받들었는데, 귀부군이 사용할 농우와 농기구는 우리나라에서 매매하도록 하였으나 매매할 값을 주지는 않았습니다. 살피건대 지원 13년(1276)에 귀부군으로서 돌아온 자들의 처[妻室]를 얻기 위해 가져온 비단[匹絹]을 달로화적(達魯花赤, 다루가치)에게 분부하여 거두어 보관하도록 하였으니, 청하건대 〈농우와 농기구의 값은〉그 안에서 취하여 지원 9년(1272) 종전군(種田軍)의 농우와 농기구 값에 준해 소 1마리에 명주 4필의 전례대로 매매하도록 해주십시오.”라고 하였다.

▲1277년 원나라 중서성(中書省)과 추밀원(樞密院)에서 황제의 칙서로 고려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면서 일본의 정벌에 소요하는 군량미와 말 사료를 부과 징수하는 첩지에서 그 당시 고려의 백성은 핍박생활에서 증오심이 충만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고려 충열왕(忠烈王) 4년(1278) 7월 3일, 왕이 또 아뢰기를, “일본(日本)은 일개 섬 오랑캐일 뿐인데 지세가 험한 것을 믿고 입조(入朝)하지 않고 감히 천자의 군대에 항거하고 있습니다. 신(臣)이 생각하건대 성덕(聖德)에 보답할 길이 없으니 원컨대 다시 배를 건조하고 양곡(糧穀)을 비축한 다음, 〈일본의〉죄상을 성토하고 토벌에 나선다면 반드시 성공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황제가 말하기를, “왕은 돌아가서 재상(宰相)들과 깊이 의논한 다음 사람을 보내서 아뢰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1278년 충열왕(忠烈王)은 일본(日本)은 일개 섬에 오랑캐로 폄훼한 사실에서 고래로부터 전통적으로 섬나라의 자연지리로 이용하여 원나라에 입조(入朝)하지 않은 것을 두고서 토벌을 주청했다.

○《고려사》고려 충열왕(忠烈王) 4년(1278) 7월 17일, 원(元)에서 평장(平章) 합백(哈伯, 카바)과 추밀부사[副樞] 패라(孛剌, 보라)를 시켜 왕에게 유시(諭示)하기를, “김방경(金方慶)을 고소한 자 2인이 모두 죽었으니 대질 신문할 수 없다. 짐(朕)은 이미 김방경의 억울함을 알고 석방하였으며, 또 흔도(忻都, 힌두)ㆍ홍차구(洪茶丘)의 군대와 종전군(種田軍)ㆍ합포진수군(合浦鎭戍軍)을 모두 돌아오게 하였다.”라고 하였다. 왕이 물러나려 하자 다시 앞으로 불러서 말하기를, “짐은 글을 모르는 거친 사람이고, 너는 글을 아는 정밀하고 세밀한 사람이지만 짐(朕)의 말을 들을지어다. 성길사(成吉思, 칭기스) 황제께서 일찍이 ‘사람이 진실로 조그마한 효심이라도 있으면 하늘은 반드시 알아준다.’라고 하셨느니라. 그대가 나를 대접하려고 술 1병과 쌀 1석을 가지고 오는 것도 또한 효이다.”라고 하였다. 왕이 아뢰기를, “신(臣)이 일찍이 홍차구의 군대를 소환해달라고 주청한 것도 황공하온대 지금 여러 군대를 모두 소환하시니 만수무강을 빌 따름이옵니다.”라고 하였다. 황제가 말하기를, “이 일들이 어찌 두렵겠느냐? 두려워해야 할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거짓말하는 것[妄言]과 약속을 어기는 것[違言]이 그것이다. 그대는 그대의 백성들을 잘 다스려서 여러 나라와 후세에 웃음거리가 되지 않으면 된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여러 군대가 귀환할 때 양민(良民)을 억지로 잡아갈까 걱정입니다. 청컨대 이를 금지시켜 주십시오.”라고 하였더니, 황제가 말하기를, “내가 이미 말했는데 누가 감히 그대의 백성을 한 사람이라도 잡아오겠는가?”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원컨대 황제께서 신임하는 몽골 사람 1인을 달로화적(達魯花赤, 다루가치)으로 임명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였더니, 황제가 말하기를, “어찌 꼭 달로화적인가? 그대가 스스로 좋아하는 대로 하라.”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우리나라 또한 상국(上國)의 법대로 호구(戶口) 조사를 할 수 있기를 청하옵니다.”라고 하고, 또 합포진수군(合浦鎭戍軍)을 머물러 있게 하여 왜구(倭寇)에 대비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황제가 말하기를, “어찌 반드시 머물러둘 필요가 있겠는가? 그렇게 한다면 그대의 백성에게 피해가 없겠는가? 그대는 스스로 그대 나라 사람들을 써서 진수(鎭戍)하도록 하라. 왜구(倭寇)는 두려워할 것이 못된다. 호구 조사 같은 것도 스스로 하도록 하라.”라고 하고, 또 말하기를, “날씨가 점점 추워지고 말들도 점점 여윌 것이니 들판의 풀이 마르기 전에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였다.

▲1278년 충열왕(忠烈王)은 상국(上國)의 법대로 호구(戶口) 조사를 할 수 있기를 청하는 동시에 합포진수군(合浦鎭戍軍)이 주둔하여 왜구(倭寇)에 대비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오히려 황제는 고려의 백성에게 피해를 줄 것을 반문하면서 고려에서 스스로 진수(鎭戍)하게 하였다.

○《고려사》고려 충열왕(忠烈王) 5년(1279) 6월 25일, 동정원수부(東征元帥府)가 〈원(元)〉중서성(中書省)의 지시를 받아 전함(戰艦) 900척을 건조하라고 하였다.

▲1279년 원나라 중서성(中書省)의 지시를 받은 동정원수부(東征元帥府)가 왜국을 정벌하기 위하여 전함(戰艦) 900척을 건조하게 하여 일본 정벌의 복속은 지속적으로 전개된 것을 보여준다.

○《고려사》고려 충열왕(忠烈王) 6년(1280) 5월 3일, 왜적(倭賊)이 고성(固城) 칠포(漆浦)에 들어와 어부들을 붙잡아갔으므로 대장군(大將軍) 한희유(韓希愈)를 파견하여 섬들을 방수(防守)하게 하였고, 또한 홀적(忽赤, 코르치)과 순마(巡馬), 여러 영부(領府) 등에서 200명을 선발하여 경상도(慶尙道)와 전라도(全羅道)로 나누어 수비하게 하였다.

▲1280년 원나라 왜적(倭賊)이 고성(固城) 칠포(漆浦)에 침략하여 어부들을 붙잡아가면서 경상도(慶尙道)와 전라도(全羅道) 일원에서 수비를 강화했다. 이 사건에서 남해안에 고성(固城)과 칠포(漆浦) 지역은 고대로 소급하여 삼국시대 왜국에 복속한 사실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륵(于勒)의 12곡 중 물혜(勿慧)는 고성으로, 보기(寶伎)는 사천으로 비정하여 임나일본부설의 토착화에 악용하였다. 이 지역은 고래로부터 왜구의 침략을 방어하는 전초기지로 분석된다.

○《고려사》고려 충열왕(忠烈王) 6년(1280) 5월 3일, 왜적(倭賊)이 또 합포(合浦)를 침입하여 어부 2명을 잡아 갔으므로 대장군(大將軍) 인후(印侯)와 낭장(郞將) 지선(池瑄)을 파견하여 원(元)에 보고하였다.

▲1280년 왜적(倭賊)이 합포(合浦)를 침략하여 어부 2명을 잡아가면서 바로 원나라에 보고한 것은 일본의 도발로 조치가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고려 충열왕(忠烈王) 6년(1280) 5월, 유비(柳庇)가 원(元)에서 돌아왔는데, 황제가 우리나라의 군졸로 왜적(倭賊)을 방어하라고 칙명(勅命)을 내렸다.

▲1280년 황제가 고려의 군졸로 왜적(倭賊)을 자체 방어하라는 것은 원나라 군사 지원을 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고려사》고려 충열왕(忠烈王) 6년(1280) 8월 26일, 원 황제를 알현하니 황제가 왕을 위하여 잔치를 열고 수행한 신하들도 잔치에 참석하도록 명령하였다. 이보다 앞서 왕이 박의(朴義)를 시켜서 상주하기를, “일본 정벌[東征]의 일은 신(臣)이 입조(入朝)하여 직접 명령을 받겠습니다.”라고 하여 황제가 허락하였다. 흔도(忻都, 힌두)ㆍ홍차구(洪茶丘)ㆍ범문호(范文虎)가 모두 앞서 명령을 받았는데, 홍차구가 말하기를 “만약 신이 일본을 정벌하지 못하면 무슨 면목으로 폐하(陛下)를 다시 뵙겠습니까?”라 하였다. 이에 약속하기를, “홍다구와 흔도는 몽골ㆍ고려ㆍ한족[蒙麗漢] 군사 40,000명을 거느리고 합포(合浦)에서 출발하고, 범문호는 만군(蠻軍) 100,000명을 거느리고 강남(江南)을 출발하여 함께 일본 일기도(一岐島, 이끼도)에서 양군(兩軍)이 모두 모여 곧바로 일본을 공격한다면 반드시 격파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7개 항목을 요청하였다. “1. 탐라(耽羅)를 지키고 있는 우리나라 군대를 일본원정군[東征軍]에 보충할 것, 2. 고려군(高麗軍)과 한군(漢軍)을 줄이고 도리첩목아(闍里帖木兒, 토리테무르)로 하여금 몽고군을 더 징발하여 출정할 것, 3. 홍차구의 직임(職任)을 더 높이지 말고 그 성공하기를 기다려서 상을 줄 것, 또 도리첩목아로 하여금 신(臣)과 함께 일본 원정에 관한 일을 관장하게 할 것, 4. 우리나라의 군관(軍官)에게 모두 패면(牌面)을 하사해줄 것, 5. 중국 땅[漢地]의 바닷가 사람들을 함께 뱃사공[梢工]과 선원[水手]으로 충당할 것, 6. 안찰사(按察使)를 파견하여 백성들의 애로 사항을 파악할 것, 7. 신이 직접 합포에 가서 군사와 말을 검열하여 보낼 것” 이었다. 황제가 말하기를 “건의한 것들을 모두 받아들이겠다.”라고 하였다.

▲1280년 고려 충열왕(忠烈王) 일본 정벌에서 몽골, 고려, 한족, 만군(蠻軍) 등의 대군이 일기도(一岐島)에서 집결하여 일본 토벌의 주청을 수용하여 전쟁준비에 돌입하게 되었다.

○《고려사》고려 충열왕(忠烈王) 6년(1280) 9월 17일, 정동원수부(征東元帥府) 진무(鎭撫) 야속달(也速達, 예쉬데르)이 문서[關字] 2건을 가지고 왔다. 1건은, “황제의 명령을 받들어 흔도(忻都, 힌두)와 홍차구(洪茶丘), 범 우승(范 右丞)과 이 좌승(李 左丞)에게 정수일본행중서성(征收日本行中書省)의 일을 위임하니, 즉시 군사와 말을 조사하도록 하고, 본국이 현재 관리하는 군량의 저축, 전함(戰艦), 뱃사공[梢工], 선원[水手] 등 일체의 군수품에 대해서는 잘 살펴서 휘하에 지시를 내려 법에 따라 준비하였다가 사용하도록 할 것이며 것이며, 그때에 가서 실수가 생기지 않도록 하십시오.”라는 것이었다. 다른 1건은, “군대들이 지나가는 곳에 법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불을 질러서 풀을 태울까 걱정되는데, 이런 일은 이해가 얽힌 일이니, 잘 살펴 휘하에 지시를 내려 방(榜)을 붙여 금지하도록 하되, 만일 어기면 문책할 것입니다.”라는 것이었다.

▲1280년 황제의 명령으로 군량미, 전함(戰艦), 뱃사공[梢工], 선원[水手] 등 일체의 군수품을 준비하면서 방화를 금지하였다.

○《고려사》고려 충열왕(忠烈王) 6년(1280) 9월 28일, 원(元)이 야속달(也速達, 예쉬데르)과 최인저(崔仁著)를 파견하여 개원로(開元路)ㆍ북경로(北京路)ㆍ요양로(遼陽路)에 거주하는 수달단족(水韃靼族)을 동녕부(東寧府)로 이주시켰는데, 장차 일본 정벌[東征]에 동원하려고 한 것이었다.

▲1280년 일본 정벌에 군사를 동원하기 위하여 수달단족(水韃靼族)을 동녕부(東寧府)에 이주시켜서 징발하게 하였다.

○《고려사》고려 충열왕(忠烈王) 6년(1280) 10월, 이달에 원(元)의 행중서성(行中書省)에서 정동군사(征東軍事)에 관한 첩문(牒文)을 보내왔다. 첩문에 이르기를, “황제의 명령을 받들어 일본국(日本國)을 정벌하게 되었다. 마침 살피건대 지원(至元) 15년(1278, 충렬왕 4) 추밀원(樞密院)의 차부(箚付)를 받았다. ‘앞서 전쟁에서는 도망 사고를 일으키거나 군역(軍役)을 빠져나간 군인이 많았다. 상주하고서 성지(聖旨)를 받았는데, 「관원을 파견하여 각 로(路)의 오로(奧魯, 아우룩) 관리들과 함께 감찰하여, 만약 그 사이에 속이거나 숨긴 사실이 있을 경우 오로 관리들에게 죄를 물어 파직시키고, 인구와 재산을 몰수하라. 이처럼 엄중하게 일을 처리하여 부족한 병력을 보충하라.」라고 하시었다. 본 추밀원(樞密院)에서 살피건대 이처럼 도망 사고와 군역을 빠져나간 군인들이 많았다는 것은 아마도 도강(渡江)한 뒤 군마(軍馬)를 여러 곳에 나누어 배치하여 정벌에 나섰기 때문이며, 그 관군두목(管軍頭目)들이 직접 관리하는 군인이 아니라 하여 마음을 써서 돌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관군두목들은〉힘이 강하고 돈이 있는 자를 지정해서 합필적발도아(合必赤拔都兒, (合必赤, 카비치 바아투르)라는 이름을 붙여서 통상 불법적으로 점유해 따로 두목관령(頭目管領)의 일을 맡기며 이들에게는 군중(軍中)의 차사(差使)를 시키지 않는다. 친관두목(親管頭目)은 도리어 부하 관리를 하지 않고 어쩌다 출정하는 일이 있으면 순초(巡哨) 등 일체의 공역(工役)을 그 나머지 군인들에게만 시키게 되니 군사력이 점점 소모되기 마련이다. 혹 출군(出軍)하여 약간의 포로를 잡으면 또 추분(抽分)이라 지목해서 거두어들이고, 군중에서는 금전과 재물을 할당하여 거둔다. 군인이 좋은 말을 가지고 있으면 군관(軍官)들이 구실을 만들어 강제로 바꾸고 군인과 말의 식량과 사료를 깎아 지급하여 군인들이 굶주리고 추위에 떠는 것을 돌보지 않는다. 관청의 공역(工役)에 빈번하게 부리면서도 군인들이 쉬워하는지 어려워하는지 헤아리지 않았다. 군인들이 병들어도 치료하지 않고 조금이라도 나으면 곧 중노동을 시켜서 노역(勞役) 때문에 못 견디고 죽게 한다. 병기ㆍ갑옷이나 다른 물건들이 손상되어도 미리 조사하지 않고, 어쩌다가 무슨 일이 있으면 그때서야 겨우 군인을 다그쳐서 빚을 내서 보충한다. 이 같은 여러 폐단이 많았기 때문에 도망가고 역(役)을 기피하기에 이르렀다. 전장에 나가서 사람과 물자 조달이 어긋나면 오로(奧魯) 안에서 보충해야 하므로 오로 관리들이 또 폐단을 일으켜서 하여 소란스럽고 불안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군대를 관리하는 관리들의 잘못이므로 만약 금지하지 않으면 새로 보충된 군인들이 전장에 나갔을 때에도 구습(舊習)에 젖어 이전처럼 노략질한 군사의 재물을 불법으로 탈취하고 군사들의 구휼에는 마음을 쓰지 않을까 걱정된다. 또 급한 때를 당하여 도망자가 생기면 다시 오로 안에서 보충해야 하므로 결국 군호(軍戶)를 손상시키고 파괴하게 된다. 이런 사유를 황제께 보고하였더니 황제의 명령이 내려왔는데, 「행중서성(行中書省), 행추밀원(行樞密院), 도원수(都元帥), 각 위(衛)의 지휘사(指揮使), 초토만호(招討萬戶) 이하 대소(大小) 관군관(管軍官), 수령관(首領官), 진무인(鎭撫人) 등을 타이르고[宣諭] 추밀원으로 하여금 조례[條畫]를 만들어 이를 금지하게 한다. 또한 제형안찰사관(提刑按察使官)으로 하여금 항상 마음을 기울여 직접 규명하도록 한다. 추밀원은 행중서성ㆍ행추밀원과 함께 군관(軍官)들이 수행한 공사(公事)의 공과(功過)를 고과해서 정확하게 보고한 다음에 상벌을 주도록 하라.」라고 하시었다.’라고 하였다. 본 행중서성에서 살피건대 출정 시기가 임박하였으니 만약 군관과 군인들에게 미리 타이르지 않는다면 기한에 임박했을 때 과오를 저질러 억울하게 죄를 받게 될 것이다. 이제 원래 내려진 성지의 전문(全文)을 초록(抄錄)하여 앞에 두고, 아울러 추밀원에서 제정한 조획을 기록한다. 바라건대 잘 살펴서 삼가 받든 성지의 내용에 따르고 추밀원의 조획에 의거하며, 또한 휘하의 군인들이 주둔하고 있는 곳에 하달하여 항상 명백하게 알려주고 엄하게 시행하도록 하라. <생략> 또 첩문(牒文)에 이르기를, “삼가 황제의 성지(聖旨)를 받들었는데 그 한 구절을 보면, ‘대관원(大官員)들이 점유하고 있는 합필적발도아(合必赤拔都兒) 군인들을 주둔지에서까지 자기 소속으로 간주하여 부려서는 안 된다. 성지가 도착한 날로 모두 본익(本翼)의 친관두목(親管頭目)에게 돌려보내어 관리하게 하고, 〈친관두목은〉 나머지 군인들과 함께 관리하여 교대로 관청의 사역에 충당하도록 하라. 출병할 때에는 합필적발도아 군인은 도착한 날 각 익(翼)의 병력 수를 점검한 후 선별하여 징발할 것이며, 귀환할 때에는 전과 같이 각각의 본익(本翼)으로 돌려보내도록 하라. 금후에는 대소 관원들은 주둔한 곳에서 이전처럼 합필적발도아 군인을 함부로 부려서 나머지 군인들에게 손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라고 하시었다. 살피건대 출정(出征)할 날짜가 가까워졌으니 본 행중서성(行中書省)에서 의논하여 아래와 같이 각 익의 관군관리(管軍官吏)들이 관할할 수 있는 합필적발도아 군인의 정원을 정하였다. 만호(萬戶)로부터 그 이하 관군 총관(管軍 總管) 및 천호(千戶), 총파(摠破) 등의 관원은 그들이 관할하는 군인의 수에 따라 정액대로 차지한다. 만약 군인의 수가 부족하면 반으로 줄여서 사용할 수 있다. 이후로 관군관원(管軍官員)들은 각각 원래 정해진 정원수에 의하지 않고 출정 군인들을 더 많이 차지하여 사용했을 때에는 관사(官司)에서 이를 조사해서 확인하거나 혹은 여러 사람들의 고발로 사실을 확인하고서 원수(元帥), 만호(萬戶), 총관(摠管)을 문초하고 중서성(中書省)과 추밀원(樞密院)에 자문(咨文)을 보내어 상주한다. 그 외에 그 아래의 천호, 총파, 백호(百戶) 등의 관원이 법을 위반하면 곧 그 직책을 파면한다. 고발자가 직역(職役)을 가지고 있는 자이면 직위를 높여줄 것이며 산군(散軍)이면 곧바로 임용한다. 이에 의거하여 다음과 같이 첩을 보내니 검토하고, 관군관원들에게 빨리 내려보내서 위와 같이 시행하도록 하라. 관원(官員)〈이 차지할 수 있는 정원〉은 도원수(都元帥) 100명, 좌ㆍ우부원수(左ㆍ右副元帥) 80명, 사만호(使萬戶) 50명, 부만호(副萬戶) 40명이다. 총관소관군(總管所管軍) 1,000명에 합필적 군인의 정원은 총관(摠管) 20명, 부총관(副總管) 10명이다. 천호소관군(千戶所管軍) 500명에 합필적 군인의 정원은 천호 10명, 부천호 5명이다. 총관파소관군(總管把所管軍) 200명에 합필적 군인의 정원은 4명이다. 백호(百戶)는 합필적 군인 정원이 2명이다. 원수부(元帥府) 수령관(首領官)의 경우는 경력(經歷) 1명에 7명이요, 지사(知事) 1명에 4명이요, 영사(令史) 5명에게 각각 3명이며, 역사(譯史)는 3명을 차지하고, 통사(通事)는 3명을 차지하고, 지인(知印)은 3명을 차지하고, 진무(鎭撫)는 7명을 차지하고, 가각고(架閣庫) 관리는 1명을 차지한다. 진무소(鎭撫所)의 경우 영사(令史)는 2명이 1명을 차지한다. 만호부(萬戶府) 수령관의 경우는 지사(知事)가 3명을 차지하고, 영사(令史) 4명은 각각 2명을 차지하고, 통사(通事)는 2명을 차지하고, 지인(知印)은 2명을 차지하고, 진무(鎭撫)는 3명을 차지한다. 총관소(總管所) 수령관의 경우에는 제령안독(提領案牘)의 관직에만 설치되는데 제령안독은 3명을 차지하고, 영사 3명은 합쳐서 2명을 차지하며, 지인은 1명을 차지하고, 탄압(彈壓)은 1명을 차지한다. 천호소 수령관의 경우에는 지관(知官)은 1명을 차지하고, 지인탄압(知印彈壓)은 1명을 차지하여 쓴다. 총파소의 경우에는 영사 2명이 한 명을 차지하여 쓰고, 백호소의 경우에는 사리(司吏)와 탄압(彈壓) 등이 1명을 차지하여 쓴다.”라고 하였다.

▲1280년 원(元)나라 행중서성(行中書省)에서 정동군사(征東軍事)에 관한 첩문(牒文)을 보내서 황제의 명령을 받들어 일본국(日本國)을 정벌하게 되었다. 이 첩문(牒文)에서 군역(軍役)에서 이탈한 군인은 감찰하여 엄중하게 처리하면서 부족한 병력을 보충하게 하였다. 관청의 공역(工役)에 군인들의 노역(勞役)으로 역(役)을 기피하는 등의 문제는 추밀원에서 조례[條畫]를 만들어 휘하의 군인들이 주둔지에 하달하여 시행하게 하였다.

○《고려사》고려 충열왕(忠烈王) 6년(1280) 11월 11일, 우승지(右承旨) 조인규(趙仁規), 대장군(大將軍) 인후(印侯)를 원(元)에 파견하여 중서성(中書省)에 상서(上書)하여 말하기를, “우리나라에서 이미 병선(兵船) 900척, 초공(梢工)ㆍ수수(水手) 15,000명, 정군(正軍) 10,000명, 군량(軍糧)은 한석(漢石)으로 계산하여 110,000석을 준비하였고, 그 밖의 기자재들은 낱낱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되어 거의 힘을 다하여 성덕(聖德)에 보답하려고 합니다. 생각하건대 제후(諸侯)가 조정에 들어가 재상이 되는 것은 옛날부터의 도리인데, 요(遼)와 금(金) 두 나라가 우리 조상을 책봉하여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를 삼았고, 나 또한 외람되게 황제의 은혜를 입어 일찍이 특진 상주국(特進 上柱國)에 임명되었으니, 이로써 헤아려보면 제후로서 조정에 들어가 재상의 직책을 가지는 것은 고금(古今)의 전례가 있는 것입니다. <중략> 우리나라는 해를 이어 농사가 잘 되지 않아서 백성들이 모두 먹을 것이 부족하기 때문에 군량(軍糧)을 일찍이 뜻대로 거두어 축적하지 못하였습니다. 현재의 군량 70,727한석(漢石) 외에는 전국의 공사(公私)가 모두 고갈되었기 때문에 대소 관원들의 월봉(月俸)과 국용(國用)에 필요한 각종 부세(賦稅)를 모두 다 수취하고 다시 각 호(戶)마다 거두어들여 겨우 40,000한석(漢石)을 준비하였는데, 이를 초과하면 더 부담하기가 어렵습니다. 정군(正軍) 10,000명의 한 달 양식을 계산하면 무릇 3,000한석(漢石)인데 저 대군은 많으면 3, 4만(萬)에 이르고 그 활단적(闊端赤, 쿠데치) 또한 적지 아니하며 또 초공(梢工)과 수수(水手) 또한 15,000명보다 적지 않습니다. 근자에 행성의 공문에 의하면, ‘내년 이른 봄에 길을 떠날 것이다.’라고 하니, 만일 여러 경로에서 관원이 계속해서 내려온다면 풀들이 돋아나는 시절을 기다리지 않고서는 군량도 오히려 충족하지 못하고 말 사료는 장차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또 듣건대 장차 5, 6월에 바다로 떠나간다고 하는데, 우리나라는 해마다 5, 6월에는 장마가 그치지 않고 약간이라도 서풍이 불면 섬에 안개가 끼고 어둡게 됩니다. 혹시나 시일이 지체되어 바다로 나아가지 못하게 되면 가을까지 공급할 식량과 배에 실을 행량(行糧)을 또 어찌 공급하겠습니까? 오직 군인과 백성이 한꺼번에 굶게 될까 걱정인데, 이러한 실정을 미리 신고하지 않았다가 뒤에 착오가 생기면 이해가 가볍지 않을까 하니 잘 살펴서 시행하기 바랍니다. 우리나라의 군인 1,000명이 탐라를 지키고 있는데, 이전에 일본을 정벌할 때 본국의 군액(軍額) 5,300명에 속되었던 군인들입니다. 생각하건대 우리나라는 땅이 좁고 사람이 희소하여 군(軍)과 민(民)의 분별이 없는데, 다시 정토군(征討軍) 4,700명을 추가한다면 그 수를 다 채우기가 어려울까 깊이 걱정됩니다. 원하건대 앞에서 말한 진수군(鎭戍軍) 1,000명을 정토(征討) 군액에 새롭게 보충하기 바랍니다. 우리나라는 이전에 달로화적(達魯花赤, 다루가치)가 있었을 때 전국의 인호(人戶)에서 쓰는 활과 화살 가운데 쓸 만한 것은 타포호(打捕戶)에 이르기까지 있는 것을 모조리 취하여 갔습니다. 또 이전 일본 정벌 때 5,300명 군인이 가지고 간 갑옷, 활, 화살은 대부분 잃어버렸고, 겨우 수습하여 부고(府庫)에 쌓아둔 것도 이미 사용할 만한 것이 못 됩니다. 하물며 이제 새로 모집한 군인 4,600명은 원래 기자재가 아무 것도 없는데 무엇으로 몸을 방어하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황제께 잘 아뢰어 갑옷 5,000, 활 5,000, 활줄 10,000을 내려주어 사기를 북돋아주기 바랍니다. 우리나라의 군인과 백성은 일찍이 진도, 탐라, 일본 3곳에서 여러 번 전공을 세웠는데도 아직 상을 받지 못하였으니, 엎드려 바라건대 이전의 전공을 조사해서 각각 패면(牌面)을 하사하여 후대 사람들을 권장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군인 1,000명마다 총관(摠管)과 천호(千戶) 각 1명, 총파(摠把) 각 2명이며, 아래와 같이 이름을 열거합니다. 원하건대 상장군(上將軍) 박지량(朴之亮), 대장군(大將軍) 문수(文壽)ㆍ나유(羅裕)ㆍ한희유(韓希愈)ㆍ조규(趙圭), 친종장군(親從將軍) 정수기(鄭守琪), 대장군(大將軍) 이신(李伸)ㆍ박보(朴保)ㆍ노정유(盧挺儒)ㆍ안사(安社) 등 10명을 총관(摠管)으로 삼고, 대장군(大將軍) 조변(趙抃), 장군(將軍) 안적재(安迪材)ㆍ허홍재(許洪材)ㆍ김덕지(金德至)ㆍ서정(徐靖)ㆍ임개(任愷)ㆍ김신정(金臣正)ㆍ이정익(李廷翼)ㆍ박익환(朴益桓) 등 10인을 천호(千戶)로 삼고, 중랑장(中郞將) 유보(柳甫)ㆍ김천록(金天祿)ㆍ이신백(李臣伯)ㆍ신혁(辛奕)ㆍ최공절(崔公節)ㆍ여문취(呂文就)ㆍ안흥(安興)ㆍ이순(李淳)ㆍ김복대(金福大)ㆍ차공윤(車公胤)ㆍ이당공(李唐公), 낭장(郞將) 박성진(朴成進)ㆍ고세화(高世和), 중랑장(中郞將) 송인윤(宋仁允), 낭장(郞將) 옥환(玉環), 계부(桂富) 김천고(金天固)ㆍ이정(李貞)ㆍ서광순(徐光純)ㆍ함익심(咸益深) 등 20명을 총파(摠破)로 삼기 바랍니다. 현재 모집한 우리나라 군액(軍額)은 경내(京內)가 2,500, 경상도(慶尙道)가 2,390, 전라도(全羅道)가 1,880, 충청도(忠淸道)가 1,900, 서해도(西海道)가 190, 교주도(交州道)가 160, 동계(東界)가 480, 총계(總計) 10,000명입니다. 병선(兵船)이 총 900척인데, 300척에 초공(梢工)ㆍ수수(水手) 18,000명을 써야 할 것입니다. 생각하건대 우리나라의 호구(戶口)는 계속 줄어들어서 이전에 일본을 정벌할 때는 대선(大船) 126척의 초공(梢工)ㆍ수수(水手)도 오히려 채우지 못했는데 하물며 이제 300척을 무슨 수로 채울 수 있겠습니까? 이로써 농민에 이르기까지 징발한 정장(丁壯)이 무릇 15,000명인데 충당하지 못한 수수(水手) 3,000명을 어디에서 징발하겠습니까? 동녕부(東寧府)가 소관하고 있는 여러 성(城) 및 동경로(東京路)의 연해 주현(州縣)에 초공(梢工)과 수구(水手)가 많이 있으니, 바라건대 3,000명을 보내주면 부족한 것을 보충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배신(陪臣) 중찬(中贊) 김방경(金方慶)은 공직(供職)한 이래로 무릇 조정(朝廷)의 명령을 받들어 한 마음으로 힘을 다하였고, 또 진도ㆍ탐라ㆍ일본 등 3곳에서 원(元) 관군을 따라 토벌하여 여러 번 승리의 공이 있었으므로 호두패(虎頭牌)를 내려주어 장려하고 위로하였습니다. 이제 다시 정군(正軍) 10,000명과 수수(水手) 15,000명을 도맡아 일본 정벌을 떠나게 되었는데, 만약 군사 업무에 참여하지 못하면 호령하기 어려워서 혹시 잘못될까 두렵습니다. 김방경의 나이는 비록 많지만 장렬한 마음은 오히려 있어 다시 힘을 다해 천은(天恩)에 보답하고자 할 것이니 원하건대 잘 아뢰어 원수부에 참여하여 공무를 맡아볼 수 있게 되기 바랍니다. 1년 군량 수입이 총계 16,732석인데 지난해에 거두어들인 것과 금년에 거두어들인 것은 총계 70,727한석(漢石)이고, 우리나라에서 모집한 정군(正軍)이 10,000명, 수수가 15,000명입니다. 중찬 김방경으로 두령(頭領)을 삼아 통솔하게 하고, 밀직부사(密直副使) 박구(朴球)ㆍ김주정(金周鼎) 등을 만호(萬戶)로 임용하여 먼저 일본에 가도록 하고, 내가 입조(入朝)하였을 때 만호 패면(萬戶 牌面)을 하사해주기를 요청하였지만 아직 명확한 회답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바라건대 잘 아뢰어 박구(朴球)ㆍ김주정 등에게도 호두패(虎頭牌)를 하사해주어 더욱 힘쓰도록 권장해주십시오. 우승지(右承旨) 조인규(趙仁規)는 몽고어와 한어(漢語)에 능통하여 무릇 조정의 조지(詔旨)와 상급 관청의 문서[上司文字]를 명백하게 번역해서 착오가 없었으며, 내가 예전에 황제의 조정에 있었을 때에도 항상 시종하였습니다. 또 공주에게도 아침저녁으로 성실하게 하여 공로가 적지 않으니 또한 패면을 하사하고, 왕경(王京)의 탈탈화손(脫脫禾孫, 토토카순) 겸 추고관두목(推考官頭目)으로 임명해주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1280년 원(元)나라에서 일본 정벌을 위하여 고려에서 병선(兵船) 900척, 초공(梢工)ㆍ수수(水手) 15,000명, 정군(正軍) 10,000명, 군량(軍糧)은 한석(漢石)으로 계산하여 110,000석을 준비하였다. 그리고 일본 정벌은 장차 5, 6월에 출정은 장마철에 서풍으로 섬에 안개가 끼면서 가을까지 바다에서 지체할 때 식량 부족을 우려했다.

○《고려사》고려 충열왕(忠烈王) 6년(1280) 11월 22일, 중찬(中贊) 김방경(金方慶)과 밀직부사(密直副使) 박구(朴球)ㆍ김주정(金周鼎)이 동정군사(東征軍士)를 사열하였다.

▲1280년 일본 정벌을 위한 정예군의 동정군사(東征軍士)를 사열하였다.

○《고려사》고려 충열왕(忠烈王) 7년(1281) 1월 20일, 정사 개원로(開元路) 동녕부(東寧府)의 왕만호(王萬戶)와 야선(也先) 대왕(大王)이 모두 일본 정벌의 일로 사신을 보내왔다.

▲1281년 지금의 중국 흑룡강성 동녕현(東寧縣)에서 원나라에서 왕만호(王萬戶)와 야선(也先) 대왕(大王)이 일본 정벌에 고려 조정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고려사》고려 충열왕(忠烈王) 7년(1281) 3월 17일, 원수(元帥) 김방경(金方慶)과 만호(萬戶) 박구(朴球)ㆍ김주정(金周鼎)이 군사를 거느리고 합포(合浦)로 향하였다.

▲1281년 고려 김방경(金方慶)을 원수(元帥)로 삼아 일본 정벌을 위하여 합포(合浦)에서 배를 타고 출전하기 위하여 장도에 올랐다.

○《고려사》고려 충열왕(忠烈王) 7년(1281) 3월 19일, 원(元)에서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의 우승(右丞) 흔도(忻都, 힌두)와 홍다구(洪茶丘, 홍차구)를 보내왔다.

▲1281년 원(元)나라 조정에서 일본 정벌에서 실전 배치하기 위하여 지휘자를 파견하였다.

○《고려사》고려 충열왕(忠烈王) 7년(1281) 3월 21일, 왕이 흔도(忻都, 힌두)ㆍ홍다구(洪茶丘, 홍차구)와 함께 〈일본 정벌에 관한〉일을 의논하였다. 왕은 남면(南面)하고 흔도 등은 동면(東面)하였다. 원(元)에 사대(事大)한 이래로 왕이 원의 사신과 동쪽, 서쪽에서 마주 보고 앉았었는데, 이제 흔도가 감히 대등한 예로 상대하지 못하였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흔도 등이 합포(合浦)로 갔다.

▲1281년 충열왕(忠烈王)은 사대주의로 원(元)나라 사신과 동쪽에 동석했으나 일본 동정을 의논하면서 고려의 위상은 독립국으로 지위가 격상한 것을 반증한다.

○《고려사》고려 충열왕(忠烈王) 7년(1281) 5월 4일, 흔도(忻都, 힌두)ㆍ홍다구(洪茶丘, 홍차구) 및 김방경(金方慶)ㆍ박구(朴球)ㆍ김주정(金周鼎) 등이 수군을 거느리고 일본 정벌에 나섰다.

▲1281년 원나라와 고려에 고위 관료가 수군을 인솔하여 일본 정벌의 장도에 올랐다.

○《고려사》고려 충열왕(忠烈王) 7년(1281) 5월 29일, 정동행성(征東行省)의 총파(摠破)가 보고하기를, “이 달 26일에 모든 군대가 일기도(一岐島, 이끼도)로 향하여 출발하였는데 홀로물탑(忽魯勿塔)의 선군(船軍) 113명과 뱃사공[梢工] 36명이 풍랑을 만나 행방불명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낭장(郞將) 유비(柳庇)를 보내 원(元)에 보고하였다.

▲1281년 5월 29일은 양력 6월 16일로 여름철에 풍랑을 만나 전선이 행방불명이 되면서 진격하기도 전에 바람과 사투를 벌여야 했다.

○《고려사》고려 충열왕(忠烈王) 7년(1281) 6월 8일, 임신 김방경(金方慶) 등이 일본과 싸워 300여 급(級)을 베었다. 다음 날 전투하였는데 홍다구(洪茶丘, 홍차구)의 군대가 패전하였다. 범문호(范文虎)는 또한 전함(戰艦) 3,500척에 만군(蠻軍) 10여 만명을 거느리고 오다가 태풍을 만나 만군이 모두 익사하였다.

▲1281년 6월 8일은 양력 6월 25일에 전함(戰艦) 3,500척에 만군(蠻軍) 10여 만명이 태풍에 몰살하면서 일본 정벌은 수포로 돌아갔다.

○《고려사》고려 충열왕(忠烈王) 7년(1281) 8월 16일, 별장(別將) 김홍주(金洪柱)가 합포(合浦)에서 행궁(行宮)에 도착하여 일본 정벌군[東征軍]이 패하고 원수(元帥)들이 합포로 돌아왔다고 보고하였다.

▲1281년 일본 정벌에서 하절기 태풍에 흔적조차 없이 몰살되었으나 원수(元帥)들이 합포에 돌아온 패전의 치욕은 감내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고려 충열왕(忠烈王) 7년(1281) 8월 24일, 좌사의(左司議) 반부(潘阜)를 파견하여 흔도(忻都, 힌두)ㆍ홍다구(洪茶丘, 홍차구)ㆍ범문호(范文虎)를 위로하였다.

▲1281년 충열왕(忠烈王)은 사신을 파견하여 원수(元帥)를 위로하였다.

○《고려사》고려 충열왕(忠烈王) 7년(1281) 8월, 이 달에 흔도(忻都, 힌두)ㆍ홍다구(洪茶丘, 홍차구)ㆍ범문호(范文虎) 등이 원(元)으로 돌아갔다. 관군(官軍) 중에 돌아오지 못한 자가 무려 10만여 명이나 되었다.

▲1281년 왜국에 도착하기도 전에 바다에서 10만여 명이나 표류하였는데, 왜군의 피해는 거의 없는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고려 충열왕(忠烈王) 7년(1281) 11월 20일, 각 도(道)의 안렴사(按廉使)가 보고하기를, “동정군(東征軍) 9,960명, 뱃사공[梢工]과 선원[水手] 17,029명 중에 살아 돌아온 자가 19,397명입니다.”라고 하였다.

▲1281년 26,989명 가운데 생존자는 19,397명으로 사망자는 7,592명은 불귀의 객이 된 것으로 보고했다. 원나라 군사는 해전에 능숙하기 못하여 거의 몰살한데 비하여 바다가 3면에 위치한 고려는 해전에 능숙한 결과이다.

○《고려사》고려 충열왕(忠烈王) 8년(1282) 6월 1일, 만군총파(蠻軍摠破) 심총(沈聰) 등 6인이 일본으로부터 도망해 와서 말하기를, “우리들은 본래 명주(明州) 사람입니다. 지원(至元) 18년(1281, 충렬왕 7) 6월 18일에 갈라대(葛剌歹) 만호(萬戶)를 따라 배를 타고 일본에 도착하였는데 사나운 풍랑을 만나 배가 부서졌습니다. 군사 무리 13~14만 명이 함께 어떤 산으로 옮겼는데, 10월 초8일에 일본군이 오자 우리 군사는 굶주려서 싸우지도 못하고 모두 항복하였습니다. 일본이 공장(工匠)과 농사지을 줄 아는 자들만 가려서 남겨두고 나머지는 모두 죽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상장군(上將軍) 인후(印侯)와 낭장(郞將) 유비(柳庇)를 파견하여 심총 등을 원(元)으로 압송하였다.

▲1282년 6월 18일 풍랑으로 전함이 부서지면서 군사 13~14만 명이 표류하여 무명의 산으로 옮겼으나 기아로 인하여 10월 8일에 일본군의 접전에서 항복하자 공장(工匠)과 농업에 종사한 사람은 살려두고 나머지는 사살시켰다. 이로써 일본이 완전한 승리로 재기할 수 없게 되었다.

○《고려사》고려 충열왕(忠烈王) 8년(1282) 8월 8일, 갑오 만군(蠻軍) 5인이 일본에서 도망쳐왔다.

▲1282년 8월 8일 만군(蠻軍) 5인이 생존하여 돌아오면서 그 당시 전황을 알 수 있게 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고려 충열왕(忠烈王) 8년(1282) 12월, 일본 정벌[東征] 당시 봉성현(峯城縣) 사람이 왜(倭)에게 잡혔다가 도망하여 원(元)의 명주(明州)에 도착하였더니, 황제가 갱생(更生)이라는 이름을 하사하고 백호(百戶) 벼슬을 주어 돌려보냈다.

▲1282년 12월에 봉성현(峯城縣) 사람이 왜(倭)에서 도망하여 돌아와서 벼슬을 내려서 사기를 진작시켰다.

○《고려사》고려 충열왕(忠烈王) 9년(1283) 1월 20일, 낭장(郞將) 구천수(仇千壽)를 원(元)에 파견하여 일본 정벌[東征] 일의 진행 상황을 탐지하게 하였는데, 평만주(平灣州)에 이르러 전함(戰艦)을 수리하는 것을 보고 이에 돌아왔다.

▲1283년 원(元)나라에서는 군사력이 왜국에 비하여 강국임에도 불구하고 전투를 하기도 전에 풍랑으로 인하여 패전하는 원인을 분석하여 실패를 재현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고려사》고려 충열왕(忠烈王) 9년(1283) 5월 26년, 정인경(鄭仁卿) 등이 원(元)에서 돌아와 말하기를, “황제께서 일본 정벌[東征] 계획을 중지시켰습니다.”라고 하였으므로 왕이 전함(戰艦) 수리와 징병(徵兵)을 중지하라고 명령하였다.

▲1283년 원나라 황제는 태풍으로 인하여 패전을 인식하고 일본 정벌을 중지하면서 고려 충열왕(忠烈王)도 정벌에 필요한 전함과 징병을 중지하게 되었다.

○《고려사》고려 충열왕(忠烈王) 11년(1285) 11월 18일, 동녕부(東寧府)가 우리의 수안(遂安)과 곡주(谷州)를 두고 다투기 때문에 원(元)에서 단사관(斷事官) 소독해(蘇獨海)를 보내와 시찰하고, 아울러 일본을 정벌[東征]할 함선의 건조 상황을 감독하게 하였다.

▲1285년 원(元)나라에서 다시 일본을 정벌에 필요한 함선의 건조 상황을 감독하면서 고려의 백성은 더욱 핍박을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고려사》고려 충열왕(忠烈王) 11년(1285) 12월 4일, 원(元) 중서성(中書省)에서 사람을 보내와 함선의 건조 상황을 감독하게 하였다. 또한 군병(軍兵)ㆍ초공(梢工)ㆍ수수(水手)의 명단을 보고하라고 하였다.

▲1285년 원(元)나라에서 함선의 건조를 독려하면서 군병(軍兵)ㆍ초공(梢工)ㆍ수수(水手)의 명단을 보고하게 하여 일본 정벌의 여부를 분석하였다.

○《고려사》고려 충열왕(忠烈王) 11년(1285) 12월 30일, 원(元) 중서성(中書省)에서 첩문(牒文)을 보내어 군량(軍粮) 100,000석(石)을 징발하게 하였다.

▲1285년 원나라에서 군량(軍粮) 10만 석(石)을 징발하게 하여 일본 정벌에서 가장 중요한 군량미 확보를 명하였다.

○《고려사》고려 충열왕(忠烈王) 12년(1286) 1월 19일, 원(元)이 사신을 파견하여 대사면령을 내리고 일본 정벌[東征]을 중지하였다.

▲1286년 원(元)나라에서 고려의 위무정책으로 일본 정벌을 종식하였다.

<자료 2> 조선시대 이익(李瀷)의 《국역 성호사설》에서 ‘왜구시말(倭寇始末)’을 아래와 같이 전문을 수록하였다.

【왜구시말(倭寇始末)】

◉고려 충렬왕(忠烈王)이 원 세조(元世祖) 때를 당하여 공주를 맞아 들여 부마가 되었으므로 그 말하는 바를 모두 좇았으니, 비록 나라 일을 주장하지는 못했으나 국운(國運)이 장원하였던 것은 또한 그 힘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이보다 앞서 원 나라가 일본에 사신을 보내면서 우리나라 사람으로 향도(嚮導)를 삼았는데, 왜인들이 의심하고 모두 죽이려하여 간신히 도망하여 살아 돌아온 자가 있었다.

△이에 왜적을 정벌할 계획을 세워 충렬왕 7년(1281) 신사(辛巳)에 원 나라는 크게 군사를 동원하여 동정(東征) 길에 나서니, 전함이 3천 5백 척이요, 만군(蠻軍)이 10여 만 명이며, 우리나라에서도 전선 9백 척과 군사 초공(梢工)수만여 명으로써 이에 협조하였다.

△일기도(一岐島)에서 양군이 회합하고 이어 참획(斬獲)이 있었는데, 마침 태풍을 만나 만군(蠻軍)이 모두 죽어 시체가 포구를 매워 밟고 다니게 되었으므로 이에 철병하여 돌아왔다.

△내가 근자에 《일본외사(日本外史)》를 얻어 읽어보니 거기에도 또한, “거의 함몰하게 되었는데 요행히 태풍을 힘입어 모면하였다.”고 했으니, 그 징창(懲創)했던 것을 볼 수 있다.

△이로부터 왜적의 환란이 지식(止熄)되었으니 이는 원 나라를 두려워한 때문이었다. 원 나라가 쇠약해지자 왜적은 또 다시 침략하였다.

△충렬왕 7년으로부터 충정왕(忠定王) 2년(1350) 경인(庚寅)은 원 순제(元順帝) 지정(至正) 10년에 해당되는데, 이에 이르러 왜적이 고성(固城) 지방을 침략했다. 왜적의 환란은 이로부터 시작하여 해마다 약탈이 없는 해가 없었다.

△우왕(禑王) 원년(1375) 을묘(乙卯)에 이르러 왜인 등경광(藤經光)이 그 무리를 이끌고 귀화하였으므로 순천(順天)ㆍ연기(燕岐) 등지에 거주하게 하고 관가에서 물자와 양곡을 지급(支給)하였다. 얼마 후에 전라도 원수(元帥) 김선치(金先致)에게 지령(指令)을 내려 등왜(藤倭)를 유인하여 주연에서 죽이려 하다가 기밀이 누설되어 경광(經光)은 무리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 달아나고 겨우 3명 만을 잡아 죽였다.

△이에 앞서 왜적들이 우리 지방을 침략해도 인명은 살해하지 않았었는데 이로부터 격노하여 그들은 이르는 곳마다 부녀자와 어린 아이를 남김없이 죽이니, 전라도와 양광도(楊廣道)의 해변에 가까운 고을은 어수선하여 마을이 텅 비었다.

△다음해 겨울에 나흥유(羅興儒)가 일본에서 돌아오고 일본에서는 중[僧] 양유(良柔)를 회신사(回信使)로 보내왔으니, 대개 충렬왕 7년 신사(辛巳)에 동정(東征)한 후로부터 절교한 지 거의 1백년이 되었다.

△이에 이르러 일본은 중 주좌(周佐)가 글을 보내왔는데, “오직 우리 서해도(西海道) 일로(一路)인 구주(九州)는 난신(亂臣)이 웅거하여 공물과 부세를 바치지 않은 지 거의 20여 년이 되었습니다.

△이 서해도(西海道)의 완만한 백성들이 틈을 엿보아 귀국 지방을 침략한 것은 우리가 한 일이 아니었으므로 조정에서 장수를 보내어 토벌하여 깊이 그 지경에 들어가 두 진영이 날마다 교전하여 거의 구주(九州)를 수복하게 되었는데, 저들이 해를 가리키며 하늘에 맹세하기를 다시는 해적 행동을 않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하였다.

△우왕 3년에 안길상(安吉常)을 일본에 보내어 비적(匪賊)을 금지할 것을 청했는데 길상은 병으로 일본에서 사망하였다.

△또 구주 절도사(九州節度使) 원요준(源了浚)이 중 신홍(信弘)을 시켜 군사 69명을 이끌고 비적을 토벌하게 했으니, 구주는 곧 서해도(西海島)를 가리킨 것이다.

△신홍(信弘)이 비적과 싸워 적선(賊船) 1척을 나포(拿捕)하여 모두 참수(斬首)하였다. 우리나라에서 또 이자응(李子膺)ㆍ한국주(韓國柱) 등을 일본에 보내어 비적을 금지할 것을 청하였다.

△그 돌아옴에 미쳐 해도포착관(海盜捕捉官) 박거사(朴居士)가 군사 1백 86명을 거느리고 계림부(鷄林府)에 침입한 왜적과 싸웠는데, 원수(元帥) 하을지(河乙沚)가 구원하지 않았으므로 거사(居士)가 패전하여 겨우 50여 명이 살아 남았다. 이 후에 날로 잔폐하여 연해(沿海)의 3면이 왜적의 침해를 입지 않은 곳이 없었다.

△우리 태조[我太祖 조선태조를 가리킴]가 군사를 거느리고 왜적을 토벌함에 미쳐 토동(兎洞)과 황산(荒山)의 승전에서 국위를 약간 떨쳤으나 저들이 바다에 출몰하여 틈을 타서 침입하니, 이를 어떻게 방어하겠는가?

△그 후에 대마도(對馬島)를 정벌한 일이 있었으나 전승을 거두지 못하였고, 삼포(三浦)의 토벌에도 오히려 남은 앙화가 있었으며, 임진년(壬辰年)에 이르러서는 그 극도에 달했다.

△그러나 왜인들도 크게 상처를 입어 수길(秀吉)로써 징계를 삼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조금 편안한 틈을 얻었으니 다행이었다.

△정포은(鄭圃隱)이 일본에 사신 갔다 돌아올 때 우리나라 사람 수백 명을 데리고 돌아왔고 또 이도(二島)의 침략을 금지했다 하였으니, 이른바 이도는 어디를 가리킨 것인지 알 수 없다.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의 계사(啓辭)를 상고해 보면, “오도(五島)에서 사로잡은 자의 말에 의하면 오도는 대마도의 우편에 있는데 땅이 적고 토지가 척박하여 호수는 1천 호 미만이요, 백성들은 일정한 직업이 없어 장사로써 생업을 삼는다 합니다.

△이들이 각처에 출몰하여 약탈이 우심하였고 평시에 우리 변방을 괴롭혔던 소수의 비적(匪賊)은 태반이 이 섬에 있는 왜적들이었습니다.

△그 침입하는 노정은 오도(五島)에서 동남풍 편에 배를 타고 삽도(三島)에 이르러 유숙하고 선산도(仙山島)를 거쳐 곧장 고금도(古今島)와 가리포(加利浦) 등지에 다다르며, 대마도에서는 동북풍 편에 배를 타고 연화(蓮花)ㆍ욕지(欲智) 두 섬에 이르러 유숙한 후 곧장 남해의 미조항(彌助項)ㆍ방답(防踏) 등지에 다다르게 됩니다.

△물길이 멀기 때문에 비록 순풍을 만난다 해도 아침에 떠나 저녁에 당도하지 못하며, 순풍도 연일 있는 것이 아니므로 바다 가운데에서 정박하고 다시 순풍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였다.

△포은(圃隱)의 이른바 이도(二島)는 오도(五島)와 삼도(三島)를 가리킨 듯한데, 이 두 섬은 곧 서해도(西海島) 구주의 변방에 속하니 우리나라와 가장 가까우며, 그 밖에 크고 작은 여러 섬이 널려 있는데, 이는 모두 구주의 서쪽 변방에 속하는 것이다.

△근자에 일본의 신지도(新地圖)를 얻었는데, 신숙주(申叔舟)와 강항(姜沆)의 두 지도에 비교하면 지극히 자세하니, 이를 상고하면 알 수 있다.

△서해(西海)의 구주 가운데에 오직 살마주(薩摩州)가 가장 서남쪽에 있다. 30년 전에 우리 통신사가 일본에 갔을 때에 왜경(倭京)에서 전례에 의하여 공궤의 경비를 배당하니 살마주에서는, “조선의 사행이 우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하고 명령을 좇지 않았다 하니, 이들도 또한 이도(二島)와 다름이 없다.

△고려 때 진포(鎭浦)의 전역(戰役)에서 왜선이 5백 척에 이르렀다 하는데 저 작은 섬에 어떻게 허다한 함선이 있었겠는가? 주좌(周佐)의 이른바, 서해도(西海道)에 웅거했다는 말이 옳은 듯하니, 나라의 중대신(重大臣)들은 이런 일을 소상히 알아야 할 것이다.

△또 생각건대 삼포(三浦)의 왜적을 토벌한 후에도 그 종자가 아직도 많아 지금도 연해에 향화촌(向化村)이라고 이르는 마을이 이루 손꼽을 수 없으니 고려 때의 글안장(契丹場)과 같은 것이다.

△이미 우리 강토에 거주하는 이상 마땅히 우리 백성이 되어야 할 것인데, 이제 들은즉 거주(居住)가 별달리 구분되어 있고 남혼 여가(男婚女嫁)도 서로 통하지 않으며 예조 서리에 소속되어 부세도 제멋대로 결정한다고 한다.

△저들은 우리나라 사람과 심리가 같지 않으니, 만약 일조에 변란이 일어난다면 너와 내가 판연히 갈리어 단결하여 그들에게 호응할 것은 분명한 일이니, 어찌 심복(心腹)의 걱겅거리가 아니겠는가? 진(晉) 나라 때 오호(五胡)의 일로써 징험해 본다면 알 수 있는 것이다.

△혹자의 말에는, “만약 당시에 우리 백성과 혼동하여 거주하게 하고 항오(行伍)에 편입하여 정의가 상합하게 했다면 수세(數世) 후에는 변화하여 우리 백성이 될 것인데, 어찌 반드시 구분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지만, 이것도 또한 심사숙고(深思熟考)한 말은 아니다.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왜인의 성질이 표독하여 원수가 있으면 반드시 보복한다.” 한다.

△중종(中宗) 5년(1510) 경오(庚午)에는 전역(戰役)에서 왜인의 죽은 자가 심히 많았는데 인하여 삼포(三浦)의 왜인을 모조리 섬멸하고 왜관(倭舘)을 혁파하였으니, 이것이 저들의 골수에 맺힌 원한이 된 것이다.

△임진왜란 때에 선ㆍ정(宣靖) 양릉(兩陵)이 참화를 입었고, 그 후 통신사가 돌아올 때에 국서(國書) 가운데 어휘(御諱)가 들어 있어 그 옳지 않음을 쟁론했으나 듣지 않았으며, 얼마 후에 사행을 먼저 떠나게 하고 추후해서 고쳐 보냈으니, 나라의 치욕이 이보다 더할 수 없는데, 이는 또한 무심중에 우연히 생긴 일은 아니었다.

△임진의 싸움에 수길(秀吉)의 사위가 진주의 싸움에서 전사했는데, 정유년에 다시 전쟁으로 들어가자 왜인이 비밀히 귀띔해 주는 자가 있더니, 과연 진주(晉州)를 도륙하여 계견(鷄犬)도 씨를 남기지 않았다.

△이 두 가지 일로써 보더라도 알 수 있는 것이니, 왜적의 정세를 연구하려 하는 자는 상고가 될 것이다.

△안백순(安百順)의 말에 “오도(五島)는 일기(一岐)와 평호(平戶) 두 섬 사이에 있는데, 서해도(西海道)의 비전주(肥前州)에 속했으니, 남북이 3백 리요 동서가 혹은 10리 혹은 50리가 된다.”고 하였다.

[출처] 이익(李瀷) 저, 정지상 역, 《성호사설》, 한국고전번역원, 1978.

▲▲▲이익(李瀷)은 왜국시말(倭寇始末)은 “충렬왕 7년으로부터 충정왕(忠定王) 2년(1350) 경인(庚寅)은 원 순제(元順帝) 지정(至正) 10년에 해당되는데, 이에 이르러 왜적이 고성(固城) 지방을 침략했다. 왜적의 환란은 이로부터 시작하여 해마다 약탈이 없는 해가 없었다.”라고 원나라의 부마국인 고려 충열왕 7년(1281)부터 일본 정벌을 기준으로 삼고 있으나

◎《고려사》에 1280년 5월 3일, “왜적(倭賊)이 고성(固城) 칠포(漆浦)에 들어와 어부들을 붙잡아 가서 원(元)에 보고하였다.”하여 1280년이 비로소 왜구가 침략한 시기로 보는 것이 정석이다.

◎왜노(倭奴)가 신라(新羅) 말엽부터 변방의 걱정거리가 되더니 고려(高麗) 말엽에 이르러서는 더욱 세력이 커져 제멋대로 하면서 어느 해이고 쳐들어오지 않는 때가 없었다.

△그러다가 아조(我朝)가 나라를 세움에 미쳐서는 교화되기를 원하여 와서 정성을 바쳤으나 실제로는 시장 무역을 통해 이익을 얻고자 함이었다.

[출처] 신흠(申欽) 저, 이상현 역,《상촌집(象村集)》, 한국고전번역원, 1994.

▲▲▲《상촌집(象村集)》에 “왜노(倭奴)가 신라(新羅) 말엽부터 변방의 걱정거리가 되더니 고려(高麗) 말엽에 이르러서는 더욱 세력이 커져 제멋대로 하면서 어느 해이고 쳐들어오지 않는 때가 없었다.”하여

삼국시대와 통일신라 전성기에는 왜노(倭奴)가 한반도에 영토를 지배한 것은 식민사학자에 의하여 조작한 반증이다.

【왜구시말(倭寇始末)의 실체】

첫째, 일본국은 고려에 조공하였다.

○1080년 일본국(日本國) 살마주(薩摩州)에서 토산물을 바쳤다.

○1082년 일본국(日本國) 대마도(對馬島)에서 토산물을 바쳤다.

○1083년 왜가 바다를 건너 보배를 바쳤다.

○1084년 일본국(日本國) 축전주(筑前州)의 상객(商客)이 수은(水銀)을 바쳤다.

○1087년 일본(日本) 상인이 토산물을 바쳤다.

○1087년 일본국(日本國) 대마도(對馬島)에서 진주(眞珠), 수은(水銀), 보도(寶刀), 우마(牛馬) 등을 바쳤다.

○1089년 일본국(日本國) 대재부(大宰府) 상인이 수은(水銀), 진주(眞珠), 궁전(弓箭), 도검(刀劒)을 바쳤다.

○1116년 일본국(日本國)에서 감자(柑子)를 바쳤다.

○1216년 일본국의 승려가 와서 불법(佛法)을 구하였다.

둘째, 왜구는 경상도 연해에 주군(州郡)을 침략했다.

○1223년 왜구(倭寇)가 금주(金州)를 노략질하였다.

○1225년 왜선(倭船)이 경상도 연해의 주현(州縣)을 노략질하였다.

○1226년 왜(倭)가 금주(金州)를 침략했다.

○1227년 1월 왜(倭)가 경상도 연해 주군(州郡)을 침략했다.

○1227년 4월 왜(倭)가 금주(金州)를 침략했다.

○1227년 5월 일본국(日本國)이 변방을 침략한 죄를 사과, 외교와 교역을 요청하였다.

○1227년 일본이 왜적(倭賊)을 찾아 죽여서 왜적의 침략이 다소 줄어들었다.

○원종(元宗) 12년(1271)에 왜구로 인하여 땅을 잃고 거창현(居昌縣)의 가조현(加祚縣)에 임시로 터를 잡았다.

셋째, 고려는 일본(日本)에게 해적질 금지를 요청했다.

○1260년 일본(日本)에 해적의 금지를 요청하였다.

○1263년 2월 왜구(倭寇)가 주현(州縣)의 공물(貢物) 수송선을 약탈하였다.

○1263년 4월 일본국(日本國)에 해적을 금지를 요청하였다.

○1263년 8월 해적은 대마도(對馬島)의 왜(倭)였다.

넷째, 일본은 고려에 조공을 단절하고 몽고(蒙古)의 통교를 무시했다.

○1267년 몽고의 국서(國書)와 고려의 국서를 가지고 일본으로 가게 하였다.

○1269년 일본이 병선(兵船)을 준비하여 고려의 침범한다는 급보가 있었다.

○1270년 조서(詔書)에서 ‘전에는 일본이 해마다 고려에 조공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1271년 1월 몽고(蒙古)가 일본국신사(日本國信使) 등 40인을 보냈다.

○1271년 3월, 몽고(蒙古)는 일본(日本)에 통교 설득이 어려워 공격하여 취할 준비를 하였다.

다섯째, 원나라 내정간섭 고려와 연합군 일본 동정에서 바람에 패전했다.

○1274년 10월 몽한군(蒙漢軍) 25,000명, 아군(我軍) 8,000명, 초공(梢工)ㆍ인해(引海)ㆍ수수(水手) 6,700명, 전함(戰艦) 900여 척이 일본 정벌에서 일기도(一岐島)에서 밤에 폭풍우가 크게 불어서 전함이 부서졌다.

○1274년 11월 동정(東征) 갔던 군사들이 합포(合浦)로 돌아왔다.

○1278년 7월 왕이 일본(日本)은 일개 섬 오랑캐일 뿐이라고 폄훼하면서 지세가 험한 것을 믿고 입조(入朝)하지 않고 천자의 군대에 항거하고 있다고 하였다.

여섯째, 원나라 일본 동정을 강행하여 패전했다.

○1280년 5월 왜적(倭賊)이 고성(固城) 칠포(漆浦)에 어부를 잡아 가서 원(元)에 보고, 고려의 군졸로 왜적(倭賊)을 방어의 칙명(勅命)을 내렸다.

○1280년 11월 고려에서 병선(兵船) 900척, 초공(梢工)ㆍ수수(水手) 15,000명, 정군(正軍) 10,000명, 군량(軍糧)은 한석(漢石)으로 계산하여 110,000석을 준비하였다.

○1281년 5월 모든 군대가 일기도(一岐島)로 향하여 출발, 선군(船軍) 113명과 뱃사공[梢工] 36명이 풍랑을 만나 행방불명되었다.

○1281년 6월 전함(戰艦) 3,500척에 만군(蠻軍) 10여 만명을 거느리고 오다가 태풍을 만나 만군이 모두 익사하였다.

○1281년 8월 일본 정벌군이 패하여 관군(官軍) 중에 돌아오지 못한 자가 10만여 명이나 되었다.

○1281년 11월 동정군(東征軍) 9,960명, 뱃사공과 선원 17,029명 중에 살아 돌아온 자가 19,397명으로 보고했다.

○1286년 1월 원(元)이 일본 정벌을 중지하였다.

【원나라 내정간섭 고려의 일본 정벌 패전의 교훈】

첫째,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재위 918-943)은 고구려의 정통성을 계승하는 동시에 삼국의 문화가 발전한 통일신라의 찬란한 국력을 기반으로 문화의 기반을 이루었다.

둘째, 고려의 문물이 발전한 황금시대는 1223년 왜구(倭寇)가 금주(金州)[김해]를 노략질하기 시작한 이후부터 일본의 외교와 교역은 대립으로 격화되었다.

셋째, 몽고제국을 기반으로 중원에 패자로 원나라의 부마국이 되면서 일본 동정에 고려는 군수물자와 군사의 징발로 국력이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

넷째, 일본은 해양국가의 자연지리를 이용하여 일본 원정에서 정권을 보존할 수 있었다.

다섯째, 고려는 원나라의 내정간섭으로 전쟁에 소요하는 물자와 인력을 지원한 결과 일본 원정은 실패하면서 왜구(倭寇)의 시말은 전시상황이 종료한 것이다.

여섯째, 일본은 한반도에서 문화를 전수한 변방국가로 삼국시대 식민지 경영은 고려시대 왜구시말을 통하여 거짓으로 증명된다.

고려는 30년 대몽항쟁의 저력은 국민통합의 구심점으로 정체성을 집약한 팔만대장경의 민족혼이 한 마음이 되었기 때문이다. 고려는 삼별초의 구국일념은 무산되면서 원나라의 부마국으로 내정간섭을 모면할 수 없었기에 본의 아니게 일본 정벌에 패하면서 왜구시말이 역사적으로 소명된다.

우주의 진리는 약육강식이다.

마치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이 작은 것은 흡수된다.

현재 한국의 상황은 구한말에 열강세력이 흡수하려는 것과 같다.

이제는 국혼의 정체성을 상실하여 반도사관에 속박되는 것도 부족하여 충남 부여까지 위나라 땅이요, 낙동강과 섬진강 일대는 왜국의 식민지로 토착하기에 숨이 가뿐 식민사학자는 어느 나라 사람인지 그 속내가 궁금하다.

옛 고구려 광개토호태왕이 말을 타고 호쾌하게 질주하며 동아시아를 제패한 한민족의 웅혼한 기상의 발로는 단군조선의 홍익인간의 이념에서 비롯한 것이며, 구국의 일념으로 의기투합한 삼별초의 대몽항쟁은 민족혼의 정수이다.

왜국의 식민지 역사를 정설로 수용하는 사학계는 왜구(倭寇), 왜노(倭奴)의 야만적인 노예로 자청하는 것은 정상인으로 보기가 어렵다.

한국은 지리적으로 세계적인 해상국가인 동시에 대륙으로 진출할 수 있는 천혜의 입지조건에서 왜소한 정체성의 식민사관에서 벗어나야 한다.

【첨부】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 교서로 일본은 소국으로 통교할 것을 요청, 일본의 군사정권 막부가 실권자로 묵살, 원나라는 고려를 전초기지로 삼아서 전함 900척을 완성하였다.

1차 1274년 고려와 몽고의 연합군이 남해안 마산 합포에서 일본 정벌에 출정하여 해안에서 정박도 하기도 전에 태풍(가미가제)이 불어서 패하였다.

2차 1281년 7월 30일에 바람이 불면서 전함은 부서지고, 병사는 섬으로 올라갔으나 일본 군사는 승기를 타고 원군의 목을 매장하였다.

고려왕은 우리 일본의 개라고 멸시하고 있으나 왜구도권(倭寇圖卷)에서 하체는 의복도 걸치지 않은 야만인으로 한국, 중국, 동남아시아 등지에 해적선을 타고 노략질로 일삼았기에 정벌한 것이다.

원나라와 고려의 연합군이 패전한 이후에 한반도는 왜구가 삼면의 바다에 정박하여 방화, 살상, 겁탈, 노략질을 일삼은 왜노의 잔학상은 적개심과 증오심을 불러일으킨다.

◈《태평기(太平記)》에 “고려왕은 우리의 개다”라고 적시했는데, 그러면 고려의 백성은 그 후예는 지금에 우리 민족은 미개하고 야만적인 왜구(倭寇)의 견자(犬子)인가?

왜, 한민족의 위대한 문화선진국을 왜구의 개로 만들려고 하는가?

한국의 사학계에 식민사학을 토착시키는 사람이 한국인이라면, 일본을 위한 반민족적인 행위는 자신을 위해서라도 바른 역사의식을 지향해야 한다.

그러하지 않으면 역설적으로 그들은 일본의 개인가? 라는 화두가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출처] KBS 국권침탈 100년 특별기획 한국과 일본 2부 적대( https://www.youtube.com/watch?v=8EaGYKXmIY4) 캡처

대한민국 국민 류금열

2022-07-22 등록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