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글

한국 국사대관의 세가지 기조

해머슴 2023. 12. 18. 21:58

고조선의 거수국들

"윤내현 교수는 《고조선연구》에서 단군조선은 강역이 넓었기에 산하의 여러 나라들을 거수국으로 삼아 다스렸다고 보았다. 중국의 제후국과 같은 개념인데, 북한은 거수국이란 용어 대신 후국이란 용어로 고조선이 여러 제후국들을 거느렸다고 본다. 여러 사서에 나오는 고조선의 거수국들은 다음과 같다. 부여ㆍ고죽ㆍ고구려ㆍ예ㆍ맥ㆍ추ㆍ기자국ㆍ진번ㆍ낙랑ㆍ임둔ㆍ현도ㆍ숙신ㆍ청구ㆍ양이ㆍ양주ㆍ발ㆍ유ㆍ옥저ㆍ진ㆍ비류ㆍ행인ㆍ개마ㆍ구다ㆍ조나ㆍ주나ㆍ한(삼한) 등이다. 북경대 대리총장과 대만대 총장을 역임한 중국의 부사년(1896~1950)은 《이하동서설》에서 "옛 숙신은 당연히 한나라 때의 조선으로, 후세의 읍루와는 관계가 없다"고 말했다. 또한 단재 신채호, 위당 정인보도 숙신을 (고)조선이라고 말했고, 북한의 리지린은 북경대 박사학위논문인 《고조선연구(1982)》에서 숙신이 고조선이라고 논증했다. (고)조선이라는 나라 이름을 중국에서는 여러 이름으로 불렀다는 뜻인데, 신채호는 《사기》<흉노열전>의 동호 역시 고조선이라고 말했다. 고조선이라는 황제국 아래에 여러 제후국이 있던 형태였다고 할 수 있다."

《이덕일의 한국통사》, 다산초당, 이덕일, 2021년(초판 5쇄), 2장: 고조선과 열국시대, 51쪽

낙랑군 위치에 대한 세 학설

"낙랑군의 위치에 대해서는 세 학설이 있다. 하나는 남한 강단사학으로서 지금의 평양이라는 것인데,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의 주장을 지금껏 추종하는 학설이다. 북한 사학계는 1962년 리지린의 북경대 박사학위 논문인 《고조선연구》발간을 계기로 낙랑군=평양설은 자취를 감췄다. 북한은 《조선전사 2》에서 "락랑군의 위치를 오늘의 료동반도 천산산맥 줄기 서쪽 료하 하류 유역"으로 보고 있다. 대체로 현 요동반도 안이다. 남한 민족사학계는 낙랑군 조선현의 위치를 현재의 하북성 노룡현으로 보고 있다. 명ㆍ청 때 영평부 자리였던 이곳에 옛 한나라 낙랑군 조선현이 있었다는 중국 사료가 여럿 있기 때문이다."

※ 개인스럽게 하나 덧붙이자면, 낙랑군이 중국 내륙 섬서성 일대에 있었다는 연구도 밝혀지고 있다. 성헌식 선생님과 같은 분이 몇년을 준비하여 섬서성 일대에 고죽국과 백이ㆍ숙제 묘가 있었음을 답사로 찾았기 때문이다. 고죽국과 백이ㆍ숙제 등은 동이족 군주로 우리 한국 역사와 관련이 깊다. 고구리 때도 "고구려는 고죽국의 후예다"라며 고신씨와 결부해서 이해한다. 섬서성에는 성헌식 선생님이 밝힌대로 고구리 영락태왕을 기념하는 영락궁까지 있어서 역사 실체에 다가갈 수록 기존 이해와 상식을 거둬야 하는 밑작업이 필요하다. 가장 답사가 용이하며, 지리 상 가까우며, 동포들도 그나마 산다는 데서 남한 민족사학이 고증한 하북성 노룡현이 낙랑군 조선현의 제 3차 이동지라는 데 의견 모으는 게 타당하다.

《이덕일의 한국통사》, 다산초당, 2021년(초판 5쇄), 이덕일, 64쪽, 2장: 고조선과 열국시대

가야 멸망

"일본과 남한의 강단사학자들의 주장처럼 서기 369년부터 야마토와가 가야를 점령하고 임나를 설치했다면 가야 왕통은 369년에 단절되든지 다른 왕으로 교체되었어야 한다. 그러나 《삼국유사》<가락국기>는 가야의 이시품왕이 346년부터 왕위에 있다가 407년에 아들 좌지왕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고 말하고 있다. 좌지왕은 407년부터 421년까지 왕위에 있다가 아들 취희왕에게 물려주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따르면 369년에 가라 7국을 멸망시키고 임나를 설치한 일 따위는 없었다. 그러니 일본과 남한 강단사학자들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불신론을 주장하는 것이다.

금관가야는 369년에 왕통의 변화 없이 김수로왕의 후예들이 계속 왕위에 있다가 신라 법흥왕 19년(532)에 구해왕이 노종ㆍ무덕ㆍ무력 세 아들을 데리고 항복했는데, 막내 무력이 김유신의 할아버지이다. 그런데 진흥왕 15년(554) 백제 성왕과 가량이 관산성을 공격했다가 백제 성왕이 전사하는데, 가량은 곧 가야다. 진흥왕 23년(562) 다시 가야 부흥운동이 일어나자 신라의 이사부와 부장 사다함이 진압했다. 남한 강단사학은 이를 고령에 있던 대가야가 멸망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가야는 끝까지 왕국으로 발전하지 못한 연맹체였다는 것인데 《삼국사(기)》는 "가야가 반란을 일으켰다."라고만 썼지 '고령 대가야'라고 쓰지는 않았다. 이사부나 사다함에 대한 사료에도 562년 가야와 싸웠다고 썼지 고령 대가야와 싸웠다고 쓰지는 않았다. 《일본서기》<흠명> '23년(562)'조는 "신라가 임나 관가를 공격해서 멸망시켰다"고 나오는데, 이 기사를 '가야=임나' 멸망 기사로 보고 대가야라고 해석한 것이다. 562년의 사건이 고령의 대가야 세력을 멸망시킨 것이라고 해석하려면 더 구체적인 사료가 제시되어아 한다. 562년의 가야 부흥운동은 진압되었고, 이후 《삼국사(기)》에는 더 이상 가야에 관한 기사가 등장하지 않는다.

《삼국사(기)》ㆍ《삼국유사》의 가야가 《일본서기》의 임나라면 562넌 이후에는 《일본서기》에도 임나가 등장하면 안 된다. 그러나 《일본서기》는 거의 100여년 뒤인 645년에도 임나가 존속하는 것으로 나온다. 따라서 《삼국사(기)》ㆍ《삼국유사》의 가야는 《일본서기》의 임나가 아니다. 구주(규슈) 지역과 키비(오카야마) 지역, 나라 등지에서 가야계 유적ㆍ유물이 다수 출토되는 것처럼 가야는 한반도 남부와 일본 열도 상당 부분을 장악했던 제국이었다. 이런 제국이 거꾸로 야마토왜의 지배를 받았다는 '임나=가야설'은 문헌사료적, 고고학적으로 근거가 없다. 562년 가야가 신라에 멸망함으로써 사국시대는 비로소 삼국시대로 진입하게 되었다."

《이덕일의 한국통사》, 다산초당, 이덕일, 2021년(초판 5쇄), 123쪽~124쪽, 3장: 열국시대에서 사국ㆍ삼국시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