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의 고구려 연표와 전시 영상에는
“낙랑군이 기원전 108년부터 서기 313년까지 북한 평양에 존재했고, 고구려 미천왕이 이를 멸망시켰다”는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와 중국 정사(正史) 기록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이 통설은 여러 측면에서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광복 80년을 앞둔 지금, 우리의 고대사 인식은 과연 ‘광복’되었는지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1. 서기 247년, 평양은 이미 고구려의 수도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천왕 21년(247년)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遷都平壤城(천도 평양성)”
즉, 3세기 중반 이미 평양은 고구려의 수도였다.
만약 이 시기에도 한나라의 지방행정기관인 낙랑군이 평양에 존재했다면, 동일한 공간에 두 개의 주권 정치체가 동시에 공존했다는 모순이 생긴다.
군사·행정·치안 체계상 이런 상황은 현실적으로 성립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국립중앙박물관은 247년 이후에도 낙랑군이 평양에 존재한 것처럼 전시하고 있다.
2. 낙랑군은 313년에 멸망하지 않았다
미천왕 14년(서기 313년)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겨울 10월, 낙랑군을 침범하여 남녀 2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이는 약탈·침공 기록일 뿐, 행정조직의 ‘멸망’이나 ‘폐지’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듬해인 15년(314년)에도 대방군을 침공했다는 기록만 있을 뿐, 멸망시켰다는 내용은 없다.
그럼에도 오늘날 많은 전시와 교과서에서는
“미천왕이 313년에 낙랑군과 대방군을 멸망시켰다”고 단정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는 일제강점기 조선사편수회가 만든 도식적 역사관의 잔재라 할 수 있다.
3. 5–6세기에도 낙랑군은 존재했다
중국 『위서(魏書)』 태무제 본기에는 432년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영주·성주·요동·낙랑·대방·현도 6군 사람 3만 가를 유주(오늘날 북경)로 이주시켰다.”
이는 낙랑군이 4세기 이후에도 존속하며
요서(遼西) 지역에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더 나아가 539년 북경 지역에서 출토된 묘지명에는
“낙랑군 조선현 사람”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즉, 낙랑군은 313년에 사라진 것이 아니라
중국 요서–유주 지역으로 이동해 6세기까지 존속한 것이다.
4. 평양에는 ‘낙랑군’이 아니라 ‘낙랑국’이 있었다
『삼국사기』 초기 기록과 북한 역사학계의 연구에 따르면,
평양에는 한무제가 설치한 낙랑군이 아니라 최리(崔理)의 낙랑국이 존재했다.
이 낙랑국은 단군 계통의 세력이 세운 토착 국가로,
중국 군현 통치와는 성격이 전혀 다른 정치체였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식민사학은
낙랑국과 낙랑군을 의도적으로 동일시하여
평양을 중국 지배의 중심지로 설정했다.
이 해석은 일본 제국의 한반도 타율 지배론과 직결된 정치적 역사관이었다.
5. 낙랑 유물 조작과 전시의 문제
일제강점기 고고학자 세키노 타다시는
북경 일대에서 구입한 낙랑 관련 유물을
“평양 출토 유물”로 둔갑시켜 조선총독부 박물관에 전시했다.
이 문제는 SBS 스페셜
〈역사전쟁: 금지된 장난〉에서도 다뤄졌다.
출토 맥락이 불분명한 유물들이
‘낙랑군 평양설’의 근거로 사용되었고,
그 유산이 오늘날 국립중앙박물관 전시에도 남아 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6. 『삼국사기』 초기 기록은 신뢰할 수 없는가?
식민사학은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신화적·비과학적”이라며 불신했다.
그러나 KBS HD역사스페셜
〈잃어버린 왕국, 백제의 풍납토성〉이 보여주듯,
초기 기록과 일치하는 고고학적 증거들이 계속 발견되고 있다.
이는 고대사 기록이 단순한 전설이 아니라
실제 역사적 기반을 가진 자료일 가능성을 보여준다.
7. 역사주권의 문제
낙랑군 평양설은 단순한 학술 논쟁이 아니다.
이는 역사주권·영토주권·문화주권과 직결된 문제다.
중국의 동북공정,
일본 식민사관의 잔재,
그리고 한국 내부의 학문 카르텔이 결합된 구조 속에서
고대 한반도와 만주의 역사 주체성은 축소되어 왔다.
국립중앙박물관과 역사 교과서는
다음과 같은 쟁점을 반영한 새로운 서술이 필요하다.
낙랑군의 실제 위치
낙랑국과의 구분
4–6세기 낙랑군 존속 문제
사료 해석의 정치성
결론: 역사광복은 아직 진행 중이다
낙랑군은 평양에 존재하지 않았고,
313년에 멸망하지도 않았다.
평양에는 낙랑군이 아니라 낙랑국이 있었으며,
낙랑군은 요서–북경 지역으로 이동해
6세기까지 존속했다.
광복 8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역사학이 여전히 식민사관의 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은
국립중앙박물관 전시가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역사광복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참고 자료
이헌동 칼럼 | 역사광복이 안 된 국립중앙박물관, 낙랑군 평양설의 실체
국립중앙박물관 비판 영상
https://youtu.be/T-WFZWsEBgY
SBS 스페셜 〈역사전쟁: 금지된 장난〉
https://youtu.be/y1fQbEqu1c
KBS HD역사스페셜 〈백제 풍납토성〉
https://youtu.be/Zi1fQuIyF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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