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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단민사》: 제 1편 상고(上古) - 제 3장 부여시대(夫餘時代)

해머슴 2023. 12. 28. 20:40

부여시대(夫餘時代)

1. 부여의 변동

부여 군장(君長)이 예(濊)의 옛 땅1이 비어있고 임자가 없는 틈을 타서 도읍을 그곳에 옮기고 예의 주민들을 편안하게 어루만지니 지명(地名) 때문에 나라 이름을 자연히 예(濊)로 고쳤다. 부여의 옛 도읍[城]이 또한 비어 있었는데 조선 뒤의 단군 서울 임금이 북쪽 강토를 통치하기 위하여 부여의 옛 도읍 둘레에 나무를 심어 울타리를 만들고 을미년에 도읍을 옮기니 지명 때문에 조선의 국호를 부여로 바꿔 부르게 되었다.

이 이름이 경인년으로부터 1,026년이나 이어졌다.

2. 기자가 동쪽에 옴

기묘년에 은(殷)나라 임금 주(紂)가 도리에 어긋남으로 주(周)나라 무왕(武王) 희발(姬發)에게 멸망하게 되었다. 이에 은나라의 신하 기자(子)가 주나라를 피하여 5천명의 유민을 이끌고 백마를 타고 동쪽으로 난수(灤水) 동평양2과 요수(遼水) 서평양3의 비어있는 땅에 나뉘어 살았다. 땅 이름 때문에 고을(國邑) 이름을 조선4이라 하니 다른 족속이 귀화한 처음 일이다.

기자는 자성(子姓)이며 이름은 서여(胥餘)인데 자작(子爵)으로 기(箕) 땅에 봉함을 받게 되었다. 주(紂)의 아버지와 같은 항렬이라는 일설에는, 기자의 이름을 수유(須臾)라 하였다.

3. 서국(徐國)의 흥하고 망함

서(徐)의 언(偃)왕이 어질고 덕이 있어, 그때에 와서 조회(朝會)하는 자가 50여 나라가 되었다.

주(周) 나라 사람들이 서의 속국을 침범하니 언왕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쳐서 서쪽으로 하상(河上)에 이르렀다. 주나라 목(穆)왕이 크게 두려워하여 화친하기를 바라니 땅을 동서로 나누어, 동쪽의 여러 제후는 서나라가 차지하게 되었다.

주나라 말기에는 초(楚)의 영(靈)왕이 신(申)5에서 만나니 서가 그 맹세에 참여하였다. 그 후에 서가 도읍을 낭야(琅邪)로 옮기며 이웃의 작은 나라를 치다가 초나라와 싸워 패망하고 말았다. 서나라의 역년은 1천여 년이었다.

4. 기씨(箕氏)의 강하고 약함

기자(箕氏)의 자손이 점점 강성하였다. 요수(遼水)의 동평양6으로 옮겼다. 땅을 크게 개척하여 동쪽은 숙신·옥저와 경계를 이루고 서쪽은 유(幽)·계(葪)·삭(朔)·역(易) 등의 땅을 차지하고 서북은 예·맥과 이어지고 북은 부여와 접하고 남은 저탄(猪灘)까지 이르러 한(韓)과 대치하였다. 마지막 대에 이르러 스스로 왕이라고 하여 군사를 일으켜 연(燕)나라를 공격하려 하다가 대부례(大夫禮)의 간하는 말을 듣고 포기하였다.

후에 연나라와 싸워 유·계·삭·역 등지 2천리를 연의 장군 진개(秦開)7에게 잃게 되니 나라의 힘이 이때부터 약해졌다.

5. 예(濊)·맥(貊)의 강하고 용맹함

예(濊)나라에는 용사가 많았고, 맥(㹮)에는 기사(騎㴬)8가 강하므로 천하에서 그 명성을 들을 수 있었다.

한(韓)9나라 장량(張良)은 진(秦)나라가 한(韓)나라를 멸한 원수를 갚고자 하여 동쪽 예 나라에 와서 힘센 장사를 찾았다. 예나라 사람(黎道令)이 이에 응하여 120근 되는 쇠뭉치를 들고 박랑사(博浪社)10에서 진황(秦皇)을 공격하다가 그 부하를 잘못 맞혔다.

한(漢)왕 유방(劉邦)11은 서초(西楚)와 서로 싸우다가 맥나라에 사자를 보내어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기사를 보내어 광무산(廣武山)12 중에서 서초의 패(覇)왕 항우(項羽)13를 공격하여 몰아냈다.

6. 위만(衛滿)이 나라를 빼앗음

조선왕 기준(箕準)14 때에 연나라 사람 위만(衛滿)15이 무리를 거느리고 왔다. 그는 상투를 하고 남쪽 오랑캐의 옷을 입고 준(準)왕에게 나아가 항복하며 서쪽 경계에 속하며 번병(藩屛)16 되기를 구하였다. 준왕은 위만을 박사로 삼고 규봉(圭封) 땅 100리를 나누어주며 서쪽 변방을 지키게 하였다.

그러나 위만은 사람들을 망명하도록 꾀어 무리를 모으고 한(漢) 나라 군사가 열 갈래로 쳐들어온다고 준왕에게 거짓 보고를 하였다. 이에 왕에게 도읍을 지키겠다 하고는 준왕을 습격하여 그 땅을 탈취하여 국호를 조선이라 했다. 기씨의 조선은 역년이 929년이다.

7. 삼한(三韓)의 분립

기준(箕準)이 위만과 싸우다가 당해내지 못하고 쫒기어 좌우의 궁인(宮人)과 나머지 수천 명의 무리를 이끌고 바다를 거쳐 남으로 한(韓)의 땅에 이르렀다. 한의 54개 군국(郡國)을 가지고 금마저(金馬渚)17에 도읍을 정하고 성곽을 쌓고 국호를 마한(馬韓)이라 했다.

마한에 속하지 않는 한(韓)의 땅은 진한(辰韓)과 변한(弁韓)으로 불러 서와 남으로 분활하였는데, 서쪽 땅은 마한이 차지하였고 남쪽은 진한과 변한이 차지하였다. 이를 삼한이라 한다.

8. 예(濊)·맥(貊)의 변혁

예의 임금 남려(南閭)가 위씨(衛氏)의 침략에 노했으나 능히 적을 막아내지 못하여 남녀 백성 28만을 이끌고 요동을 지나 지나(支那) 한(漢) 땅에 이르러 한의 지경 안에 속할 것을 청하였다. 한무제(漢武帝) 유철(劉徹)이 그곳을18 창해군(蒼海郡)이라 하고 팽오가(彭吳賈)를 보내어 맥의 땅을 취하여 창해(蒼海)의 길을 뜷어 통하게 하였다. 이에 인부들의 노역이 매우 커서 연(燕)과 제(濟) 사이의 백성들이 흔들리기 시작했으며 비용 또한 많이 들어 한(漢)이 지치고 쇠약해지므로 수년이 못되어 창해군을 없앴다. 그리고 그 땅을 비워두게 되었다.

9. 위씨의 나라가 망함

위만의 손자 우거(右渠)가 군사의 위력과 재물의 힘으로 숙신 남쪽과 옥저 모두를 빼앗았으며 예·맥의 옛 땅을 쳐서 점령하고 군사를 거두어 한(漢)의 동부도위(東部都尉) 섭하(涉河)를 쳐들어가 죽였다. 이에 한무제(漢武帝)가 장군 양복(楊僕)과 구체(苟彘)를 보내어 쳤다. 우거가 그들을 맞아 싸워 양복의 군사를 깨트리고 또 한(漢)의 장수 공손수(公蓀遂)와 맞서 싸웠다.

그러나 나라 안에 변이 생겨 우거가 그 신하에게 살해되고 또 우거의 대신(大臣) 성기(成己)가 왕성을 굳게 지키고 쓰러지는 나라를 붙들다가 난민(亂民)에게 해를 당하였다. 위씨의 나라는 87년에 그쳤다.

10. 사군(四郡)의 시작과 끝

한(漢)이 기씨(箕氏)를 멸하고 그 땅에 낙랑(樂浪)·임둔(臨屯)·현토(玄菟)·진번(眞蕃)의 사군(四郡)을 두었다. 사군의 땅이 한(漢)과 너무 멀어 통제하기 어려움으로 진번을 현토에 합하여 평주도위부(平州都尉府)로 삼고, 임둔을 낙랑에 합하여 동부도위부(東部都慰府)로 삼았다.

또 이 두 부(府)의 읍치(邑治)를 요수(遼水) 서쪽으로 옮기고 거기에 속한 현(縣)의 이름과 읍치(邑治)까지 두니, 본 땅이 비기 때문에 무수한 부락들이 제각기 나라를 세웠다. 숙신과 옥저는 이 기회를 타서 잃은 땅을 다시 회복하였다.

각주 1. 예의 옛땅(濊之古土) - 지금의 개원(開原).

각주 2. 동평양(東平陽) - 지금의 영평(永平).

각주 3. 서평양(西平陽) - 지금의 광녕(廣寧).

각주 4. 조선(朝鮮) - 평양총명(平壤總名).

각주 5. 신(申) - 상해(上海)

각주 6. 요수(遼水)의 동평양(東平陽) - 지금의 요양(遼陽) 땅.

각주 7. 진개(秦開) - 중국 전국 시대 연(燕)

각주 8. 기사(騎㴬) - 말을 타는 일과 활을 쏘는 일

각주 9. 한(韓) - 중국의 한(韓)

각주 10. 박랑사(博浪社) - 하남성(河南省) 양무현(陽武縣).

각주 11. 유방(劉邦) - 중국 한(漢)나라 고조(高祖)의 이름.

각주 12. 광무산(廣武山) - 하남성 하음현(河陰縣).

각주 13. 항우(項羽) - 진나라를 멸하고 서초의 패왕이 됨. 후에 유방에게 패하여 자결함.

각주 14. 기준(箕準) - 기자 41세. 기자조선의 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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