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장 부여시대(夫餘時代) 1. 부여의 변동 부여 군장(君長)이 예(濊)의 옛 땅1이 비어있고 임자가 없는 틈을 타서 도읍을 그곳에 옮기고 예의 주민들을 편안하게 어루만지니 지명(地名) 때문에 나라 이름을 자연히 예(濊)로 고쳤다. 부여의 옛 도읍[阿城]이 또한 비어 있었는데 조선 뒤의 단군 서울 임김이 북쪽 강토를 통치하기 위하여 부여의 옛 도읍 둘레에 나무를 심어 울타리를 만들고 을미년에 도읍을 옮기니 지명 때문에 조선의 국호를 부여로 바꿔 부르게 되었다. 이 이름이 경인년으로부터 1,026년이나 이어졌다. 2. 기자가 동쪽에 옴 기묘년에 은(殷)나라 임금 주(紂)가 도리에 어긋남으로 주(周)나라 무왕(武王) 희발(姬發)에게 멸망하게 되었다. 이에 은나라의 신하 기자(箕子)가 주나라를 피하여 5천명..